나는 애국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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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국청년이다
[권성민 PD의 끼적끼적]
  • 권성민 전 MBC PD
  • 승인 2015.04.2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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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숨을 들이쉬고 자란 내 유년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아득했던 십대를, 치열했던 이십대를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를 사랑한다. 조사 하나만으로도 다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이 나라의 언어가 내게 스며들었기에 이 나라를 사랑하고, 그 언어로 쓰인 문학의 순간들이 감각 속에 조각조각 새겨져 있어 이 나라를 사랑한다. 내 피부색 때문에 부당한 특혜나 차별을 당하지 않아도 되기에 사랑하고, 의료보험이 잘 갖추어져 있어 사랑하며, 혈관 같은 대중교통 덕분에 적은 돈으로도 발이 자유롭기에 사랑한다. 그 어느 나라보다 치킨이 맛있어서 사랑하고, 심지어 꽤 늦은 시각에도 집으로 배달해 먹을 수 있어서 사랑한다. 무엇보다 참으로 척박한 토양 위에서도 불의에 항거해온 역사를 가진, 그래서 더디어도 조금씩, 더 나아져 온 이 나라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생애 가장 참혹했던 2년의 군복무였지만, 스스로 바닥을 볼 수 있었던 그 속에서도 성의를 다했다. 눈 감고 싶어질 때마다 은사께서 보내주신 박노해 시인의 ‘썩으러 가는 길’을 곱씹어 읽었다. 예비군 소집 때면 세상 그 어떤 순간보다 짜증이 치밀지만, 그래도 혹여 전쟁이 터지거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뛰어갈 준비는 되어있다. 국가에 충성이라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개념 때문이 아니라,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웃음을 나누는 오로지 그 사람들 때문이다. 군대는 내게 여전히 필요악이다. 징병제는 그 징병 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장 추악한 모습과 마주하게 한다. 어떤 조직이 본질적으로 선한지, 아니면 필요악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그 조직의 할 일이 많아질수록 좋은 사회인가를 자문해보면 된다. 군대가 할 일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지옥에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악의 때에 군대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라를, 정확히는 그 나라 안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일을 앞둔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 애국선열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와 통일에 대한 시민들의 염원을 적은 대형 태극기들이 전시돼 있다. ⓒ뉴스1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통치 조직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사랑하는 것이 내 아이라면, 사정 상 내가 돌보지 못하는 동안 아이를 대신 돌봐줄 도우미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라는 통치조직이다.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부모라면, 도우미의 미심쩍은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을 테다. 도우미가 잘하고 있는지, 아이의 필요는 잘 챙겨주고 있는지, 혹시라도 불필요한 회초리를 휘두르지는 않는지, 시마다 때마다 확인하고 싶을 수밖에 없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도우미를 사랑하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통치조직을 사랑하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에게 항의를 하고, 사사건건 의심하고,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나라를 망치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내 한 몸 잘살기는 차라리 쉽다. 불편한 일이 있거든 눈 감고, 그러려니 하고, 오늘 먹을 내 한 끼가 얼마나 더 좋아질까만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른다. 자기 일도 아닌데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머리를 짓누르며 한숨을 쉬는 것은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기에,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사기도 쉽다. 하지만 나라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나라에 내 사람들이 살고, 내 다음 세대가 살 것이며,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나 역시 이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참견하고, 의심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기에, 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 다음 세대가 이 나라에서 살아갈 때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나며 살아가길 원한다. 내게 그것은 삼성과 현대가 지구촌 이국땅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아이폰이나 샤오미를 써도 괜찮고, 쉐보레나 도요타를 타야해도 괜찮다. 불모지와도 같은 환경을 뚫고 빙판 위로 날아오르는 김연아의 금메달에 가슴이 울컥하지만, 그녀 자신의 아름다운 성공이 좋은 나라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금발벽안의 외국인들이 어설픈 발음으로 “강남스타일”을 따라 외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유쾌하지만, 유쾌한 웃음거리는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넘친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더 좋은 나라는,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나라이고, 한나절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퇴근한 뒤 가족들과 저녁을 들며 영화 한 편을 즐길 수 있는 나라이고, 아이들이 햇살을 벗 삼아 양껏 뛰어놀 수 있는 나라이다. 조금 더 어려운 일, 조금 더 많은 일을 하면 소고기도 사 먹고 비싼 술을 마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직업을 가지든 하루 여덟 시간만 열심히 일하면 적어도 먹고 입고 누워 자는 걱정만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나라이다. 삼성과 현대가 바다 건너 깃발을 휘날리고, 강남스타일이 타임스퀘어에 울려 퍼져서 이런 것들이 이루어진다면 진심으로 응원하겠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그 볕이 들지 않는 그늘이 너무 많아 보인다.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 하지만 태극기나 애국가보다는, 이 나라를 하루하루 일구어가는 사람들의 웃음 짓는 얼굴에 가슴이 벅차다. 외국에서 만난 친구가 ‘남쪽’(south)인지 ‘북쪽’(north)인지를 물어보는 것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지만, ‘돼’와 ‘되’를 틀리는 이곳의 친구는 꼭 짚어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를 잠시 맡긴 공직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거나 사소한 잘못이라도 보인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묻고 따지고 덤벼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짜 애국,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다. 부디 자신의 아이와, 아이를 맡긴 도우미를 헷갈리는 말도 안 되는 부모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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