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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12 07:50
  • 수정 2015.05.14 18:43

“요리 열풍 ‘일상의 행복’ 욕구가 커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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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요리하는 이욱정 KBS PD

▲ 이욱정 KBS PD. ⓒPD저널

지난 6일 오후 상수동 요리인류 쿠킹 스튜디오 앞. 현관문 밖으로 경쾌한 도마질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 너머 들여다보니 요리 연습이 한창. 낯익은 얼굴이 분주히 도마질을 하고 있었다. KBS <요리인류 키친>의 이욱정 PD다.

그런데 PD가 웬 요리연습? 의아하게 느껴지겠지만 이 PD에게는 요리연습이 곧 프로그램 준비다. 그는 매일 오전 10분씩 방송되는 데일리 요리 프로그램 <요리인류 키친>의 연출과 진행을 동시에 맡고 있다.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요리연습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지난 2008년부터 <누들로드>, <요리인류> 등 굵직한 음식 관련 다큐멘터리로 이름을 날린 그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요리 프로그램에 도전한 소감은 어떨까.

“레스토랑의 쉐프보다 매일 집밥하는 엄마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죠. <누들로드>, <요리인류> 모두 장기 기획이었는데, 긴 호흡의 대형 프로그램은 그 나름의 어려움이 물론 있지만, 데일리 프로그램은 매일 부딪쳐야 하는 과제가 있어요.”

매일 즐겁고 편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하되, 지루하지 않도록 변화를 주어야 하는 집밥처럼 데일리 프로그램에도 숨은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요리인류 키친>은 연예인 한 명 없이 이 PD 혼자서 진행하는 ‘원맨쇼’이다 보니 고민은 두 배. 하지만 이 PD는 그런 어려움에도 “즐겁고 재미나다”고 했다. 그는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매일 즉각적인 피드백이 나온다는 점이 신기하다”며 “두 장르 모두 힘들지만 서로 다른 매력과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방영 한 달째, <요리인류 키친>은 순항중이다. 시청률을 잡기 힘든 오전 시간대에 편성한 대신 온라인과 모바일 서비스에 주력했다. 이 PD는 “포털에서 제공하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5주 만에 조회수 520만을 달성했고 팔로잉 하는 팬 수도 6000이 넘었다”며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나 미니 시리즈 등을 제외하고는 팬 수 5000이 넘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이어 “연예인도 쉐프도 아닌 PD 한 명이 진행하는 이런 짧은 요리쇼가 인기 프로그램 랭킹에 올라가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 지난 6일 서울 상수동 요리인류 쿠킹 스튜디오에서 이욱정 PD가 요리 연습을 하고 있다. ⓒPD저널

PD 한 명이 직접 요리를 하고 진행을 한다는 이 무모한 기획은 이욱정 PD이기에 가능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명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뢰’로 요리유학을 다녀온 쉐프이기도 하다. 2008년 <누들로드> 연출을 마치고 “제대로 된 요리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훌쩍 유학을 다녀온 그는 PD와 쉐프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이 PD는 두 가지 이름 중 주저 없이 PD라는 이름을 택했다.

“요리학교를 나왔다고 다 쉐프는 아니니까요. ‘진짜 PD’가 쉽게 얻을 수 없는 직함이듯이 ‘진짜 쉐프’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기획해 TV에 걸어본 사람만이 진짜 PD이듯, 진짜 쉐프도 자기의 이름을 걸고 만든 음식을 사람들한테 대접하고 팔고 평가를 받아본 사람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PD이지 쉐프는 아니에요.”

그는 스스로를 “쉐프가 아닌 쿡”이라고 말했다. 요리를 하는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쿡’이 자신에게 더 맞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음식과 요리에 늘 관심이 많았지만, 한 번도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에게 요리는 요리 그 자체로서가 아닌 ‘문화’와 ‘콘텐츠’라는 차원에서 흥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요리유학을 다녀온 것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로서 ‘요리’라는 콘텐츠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갖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요리인류>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으로 유학을 간 거죠. 저는 두 가지 계산을 갖고 있었어요. 하나는 직접 요리를 배워보면 새로운 시각이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어봐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이 PD는 “PD만큼 그 프로그램을 다 꿰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PD가 진행자가 되어 이야기꾼 역할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며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외국 다큐멘터리에서는 PD가 곧 진행자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혼자서 진행하는 요리 프로그램의 장점은 요리의 숨은 이야기나 요리 과정 자체를 충실하게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요리인류 키친>은 그 동안 내가 만들어 온 프로그램과 별개의 것이 아닌 내가 구상한 요리 프로그램 ‘마스터플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요리인류 키친>은 1993년 종영된 <가정요리> 이후 KBS에서 22년 만에 부활한 데일리 요리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요리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 동안 음식과 요리를 다룬 프로그램은 비주류에 가까웠다. 22년 만에 부활한 데일리 요리 프로그램이 온라인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 이욱정 KBS PD. ⓒPD저널

이 PD는 “요리나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라이프 스타일이 변화한 것”이라며 “음식에 대한 인식이 ‘끼니’에서 ‘놀이’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옷이 외부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인 패션이 됐듯이, 요리와 음식도 나를 표현하는 것, 재미있는 놀이, 문화적 트렌드가 됐다”며 “요리가 사람들의 재미와 놀이, 즐거움, 행복의 한 요소가 됐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변화”라고 의미를 짚었다. 또한 “지금의 요리 열풍은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 음식에 관심을 보였던 웰빙 열풍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진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PD는 이러한 변화가 ‘일상의 행복’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빨리 승진하고 집 평수 늘리는 게 삶의 목표였던 시절에는 ‘먹는 것’은 그냥 부차적인 문제였다”며 “그런 목표가 이제는 쉽게 도달할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그런 가치관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요리와 먹을거리 같은 일상의 작은 행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요리는 함께 나눌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며 “요리에 대한 관심은 행복해지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요리를 통해 주위 사람들과 교류하고 공감하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행복의 요소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PD는 “이러한 트렌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라며 “이에 따라 요리와 관련된 콘텐츠들도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만들어지리라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최근 쏟아진 요리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프로그램의 성격은 각기 다르지만, 다채로운 요리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TV에서 오락을 원하기 때문에 예능화된 요리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며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이 요리 프로그램을 ‘볼 만하다’고 인식하게 되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된다면 그 프로그램의 포맷과 상관없이 박수를 보낼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올리브 채널 등에서 불과 몇 년 사이 ‘요리 프로그램은 재미있다’는 인식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해 같은 PD로서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며 “내가 만드는 인문학적인 색깔의 프로그램은 오히려 비주류에 속할지 모르지만 각자 잘하는 분야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PD는 TV가 만들어낸 이른바 ‘스타 쉐프’들에 대해서도 “또 다른 동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요즘에는 요리사도 결국엔 스토리텔러”라며 “어느 직종이든 글이나 영상, 미디어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요리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쉐프, 방송인, 스토리텔러의 경계와 틀에 연연할 필요 없다”며 “내가 <요리인류 키친>의 진행을 맡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실 요리 실력으로만 보면 나는 ‘진짜 쉐프’들에 비할 바가 못 되는데, 요리 잘하는 ‘진짜 쉐프’들은 방송에서 요리 대신 말을 하고, 닉네임 ‘배드 쿡’인 나 같은 사람은 요리를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이긴 하다”라며 웃었다.

이 PD는 교양 PD 중에서는 흔치 않은 ‘스타 PD’다. ‘이욱정 PD’하면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프로그램들이 있다는 건 그가 이미 하나의 브랜드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PD는 “나의 온갖 엉뚱한 실험들과 검증되지 않은 기획, 돈 안 되는 시도들을 받아주고 가능케 한 것은 KBS가 공영방송이기 때문”이라며 “내 이름으로 일종의 브랜드가 만들어졌다면, 그건 KBS라는 텃밭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그는 “<누들로드>도 요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생소했던 당시로서는 굉장히 위험 부담이 큰 검증되지 않은 기획이었다”며 “그런 프로그램이 가능했던 건 KBS가 상업 논리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제작자의 자율성과 색깔을 살려줄 수 있는 공영방송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이욱정 KBS PD. ⓒPD저널

이 PD는 요리 프로그램이야말로 공영방송이 책임지고 만들어야 하는 분야라고 주장했다. 그는 “BBC나 NHK 같은 세계적인 공영방송들이 음식과 요리 같은 콘텐츠에 많은 관심을 갖고 투자하는 이유는 ‘먹을거리’라는 공공재를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며 “음식과 요리는 공공적인 분야인 동시에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테마이며 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말했다.

이어 “영국에서는 지상파 채널에서만 요리 프로그램이 20개가 넘는데, 이렇게 해외 방송들이 요리 콘텐츠에 힘을 쏟는 건 음식이 남녀노소와 정파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 분야, 행복과 웰빙, 건강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라며 “요리는 여가, 건강, 환경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삶 자체”라고 말했다.

“여가와 취미, 건강, 올바른 먹을거리에 대한 논의와 환경 문제 등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다 음식 안에 담겨 있어요. 제대로 된 요리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건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른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 분야의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앞으로 두 달 가량 남은 <요리인류 키친>을 마친 뒤 내년에는 <요리인류 시즌2>를 선보일 예정이다. 온통 요리 생각뿐인 그는 인터뷰 도중에만도 몇 개의 요리 프로그램 관련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앞으로도 쭉 요리 프로그램 PD로만 남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도 쭉 요리 관련 프로그램만 만들 생각이에요. 이 분야에서 하고 싶은 것들,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이 너무너무 많거든요. 시간이 부족할 정도예요.”

앞으로 그가 계속해서 보여줄 요리 프로그램은 어떤 맛일까. PD이자 ‘쿡’인 그의 맛있는 여정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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