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은 떠났지만 숙제는 남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MBC ‘압구정 백야’ 논란 천편일률적 연속극의 한계 고스란히 드러나

▲ MBC ‘압구정 백야’ ⓒMBC

‘시청률 흥행 보증수표’, 혹은 ‘막장 드라마의 대가’라는 양극단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임성한 작가가 은퇴했다. 임 작가는 지난 15일 MBC 일일극 <압구정 백야> 홈페이지를 통해 “여러분의 열정과 고생 덕에 단점 많은 작품이 빛날 수 있었고 좋은 결실을 맺었습니다”라며 은퇴 심경을 밝혔다. 20년 가까운 파란만장했던 작가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임 작가의 은퇴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그간 국내 드라마계에서 숱한 논란을 일으킨 작가이기 때문이다. 임 작가는 드라마의 시청률과 화제성을 동시에 몰고 다녔다. 지난 1998년 첫 연속극인 MBC <보고 또 보고>를 집필했을 땐 57.3%라는 경이로운 시청률 성적을 기록했고, 이후 선보인 작품들도 시청률 가뭄 속에서 꾸준히 흥행을 거뒀다.

또한 드라마 소재에선 혈연 위주의 가족 제도를 비트는 파격을 선보이거나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았다. 자신이 버린 친딸을 며느리로 삼거나 계모가 의붓딸을 기생으로 만들었다.(SBS<하늘이시여>, <신기생뎐>) 또 MBC<오로라 공주>에서 주요 인물 10명이 교통사고나 유체이탈 등으로 사망하거나 하차하면서, 일명 ‘임성한 표 데스노트’라는 조롱까지 나올 정도였다. 은퇴작이 된 <압구정 백야>도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지나치게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프로그램 중지’ 의견을 받기도 했다.

▲ MBC ‘인어아가씨’ ⓒMBC

이렇게 국내 드라마계에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임성한 작가가 떠났다. 하지만 ‘임성한 월드’는 여전하다. 비난 여론 속에서도 임성한 작가를 ‘시청률 구원 투수’로 기용했던 방송사. ‘막장 드라마’를 비판하는 듯했지만 ‘막장 줄거리’를 그대로 받아써서 기사로 재생산하는 데 급급했던 언론사, ‘막드’를 욕하면서도 채널을 고정했던 시청자까지. 임성한 작가의 ‘막장 코드’를 강화하는 데 일조해온 이해 당사자 모두 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사에서는 임성한 작가를 ‘모셔가기’에 바빴다. 본방송의 광고 완판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라면 욕먹을 각오로 ‘임성한 표 드라마’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MBC는 <압구정 백야>를 비롯해, <인어아가씨>, <왕꽃 선녀님>, <오로라 공주> 등 일곱 편을 편성했고, SBS는 주말극 <하늘이시여>, <신기생뎐>을 방영했다. 고료는 천정부지로 솟았다. 회당 고료가 2800~3000만원가량 받는 것으로 알려진 임 작가를 향한 러브콜이 멈추지 않았던 건 방송사의 ‘시청률 지상주의’를 쫓아가는 섭외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시청자도 ‘막장 드라마’의 반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임성한 작가를 ‘스타 작가’로 만든 건 시청자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강지처를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딸을 그린 MBC <인어아가씨>, 무속 신앙의 요소를 안방으로 끌어들인 <왕꽃 선녀님>, SBS <하늘이시여> 등은 비난 여론에도 평균 30%대 시청률을 기록했다. 시청자들이 ‘막장 드라마’를 기피하는 듯해도 막상 뚜껑을 열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걸 보면, 드라마 콘텐츠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물론 MBC<오로라 공주> 추가 연장 소식에 반대 서명 운동이 벌어지긴 했지만 시청자들이 막장 요소에 상당히 길들여졌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 SBS ‘하늘이시여’ ⓒSBS

이처럼 임성한 작가는 ‘막장 드라마’를 둘러싼 방송사와 시청자에게 숙제를 안겼다. 임 작가가 물꼬를 튼 ‘막장 드라마’가 날이 갈수록 고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임성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를 내걸었던 홈드라마 일일극, 연속극들이 회를 거듭할수록 ‘임성한스러운’ 전개를 마주하는 건 익숙한 일이 아니던가.

좀 더 넓게 보면 ‘막장 드라마’의 태생 자체가 일일 연속극의 한계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일일극 한 작품당 120회에 달하는 분량, 즉 6~8개월 이상 방영하면서 드라마의 작품성과 개연성을 기대하기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제작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존 출연자끼리 얽히고설킨 ‘막장 요소’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임성한 작가의 ‘막장 드라마’와 관련해 MBC는 더 이상 계약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시청자들은 임 작가의 은퇴 소식에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언론사들은 ‘막장 드라마와의 아듀’를 고하고 있다. 임성한 작가의 은퇴와 맞물려 천편일률적인 연속극 위주의 드라마 운용의 맹점이 드러난 지금, 변화의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 MBC ‘압구정백야’ ⓒMBC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