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재의 詩詩한 이야기] 봄날, 그땐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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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ㅂ→여름인 듯. 봄은 찰나 -_-;;” 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른 4월 어느 날 이런 카톡이 왔다. 발신자는 20대 여성이다. 이모티콘은 땀방울 맺힌 콧등과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어릴 적 나의 봄은 내복 벗는 날 시작되고, 반팔을 입는 날 끝났었다. 요즘엔 겨울에도 내복 안 입고, 한겨울만 지나면 반팔 입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봄은 찰나”란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이 제 인생의 ‘봄날’이란 걸 알고 있을까?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자기의 엉덩짝 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놓았네/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이 있었네/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십 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송찬호, <봄날> 전문

▲ ⓒpixabay

화사한 봄날 풍경이 왜 이리 쓸쓸한가. 그것도 봄볕 따사로운 냇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기 안주에 술잔을 나누는데 말이다. 화자는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라고 조용히 탄식한다. 때는 봄날이지만, 우리의 봄날 즉 젊은 시절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왁자지껄 떠들지도, 목청껏 노래 한곡 뽑지도 않고, 복사꽃 흐르는 냇가에서 술잔만 기울이다 돌아온 것이다.

봄날이 심드렁하다 못해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마비에 대한 자각이다.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는 꿈을 잃었는데 이제 아프지도 않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며, 우리는 모두 마비 상태로 봄을 맞았다.

그러니 누군가 빠진 것처럼 이 자리가 허전하다. ‘십 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는 소식도 없는데, 우수수 떨어진 복사꽃만 냇물에 실려 떠내려 온다. 복사꽃 친구는 십 년 전의 화자일 수도 있겠고, 같은 꿈을 꾸다 갑자기 사라진 친구, 혹은 아직 꿈꾸고 있는 친구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복사꽃 친구는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아직 마비되지 않고 있는’ 냇물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한이 담긴 술잔을 복사꽃 냇물에 띄울 뿐이다.

젊은 시절을 봄에 비유하는 것은 흔하고 오랜 수사법이다. 청춘(靑春)이니 방년(芳年)이니 하는 말도 거기서 나왔다.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제목은 거의 관용구가 됐다. 송찬호의 <봄날>이 이해는 되나 공감은 안 된다면, 그 독자는 아직 ‘봄날’일 가능성이 높다.

산 속에 들어가면 산이 안 보이듯이, ‘봄날’도 지나간 뒤에야 안다. 국어시간에 ‘청춘예찬’ 배우면서, 지금이 내 인생의 봄날이라고 생각한 친구가 몇이나 있었을까.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청춘이 아닌 선생님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청춘들은 듣기만 하여도 눈꺼풀이 내려오는 시절이었다.

지질한 청춘이 떠나가고, 아픈 불혹의 봄날도 지나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또 흘러,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면?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태백에 가야겠다/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올해 몇이냐고/쉰일곱이라고/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좋을 때다 좋을 때다/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괜스레 나를 보고/늙었다 한다

-정희성, <태백산행> 전문

칠십 노인도 자신이 쉰일곱 때는 그때가 ‘조오흘 때’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이 보기에는 일흔 넘긴 때도 참 ‘조오흘 때’일 것이고. 그러고 보면 좋을 때가 아닌 때는 없지만, 또 아무리 좋을 때라 해도 당시엔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느낄 뿐이다. 바로 그 순간 현재는 이름표도 없이 과거의 창고에 쌓인다. 우리는 현재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의미는 항상 뒤늦게 드러난다. “비읍” 소리만하고 가버린 봄날도 그녀에게 이름 지어달라고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땐 그녀가 온갖 색깔이 어우러진 이름을 지어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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