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死’가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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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민 PD의 끼적끼적]

암이라고 했다. 같은 팀에서 일했던, 나와 비슷한 연배의 PD였다. 그것도 꽤 많이 진행된 상황이라고 한다. 듣는 순간 머리가 멍했다. 흔하디 흔한 드라마 대사가 떠올랐다. 많이 아팠을텐데, 이렇게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질문과 동시에 대답이 따라왔다. 말이 된다. 방송사 생활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팀마다 업무강도가 다르지만, 어느 팀에 들어가든 규칙적인 생활이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다. 예능의 경우 대부분 주 1회 방송이기 때문에, 생활은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사이클이 돌아간다. 식사도 잠도 하루 단위의 어딘가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이라는 틀 안에서 아무 곳에나 배치되기 일쑤다. 일이 많은 팀에 배치됐다면 한 주에 두세 번 퇴근하는 삶이 이어진다.

지금은 그래도 팀원들이 중지를 모아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휴일을 포함한 일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지만, 팀원들 삶의 질에 별로 관심이 없는 연출을 만나면 그마저도 어려워진다. 재수 없으면 그런 팀에만 연달아 몸담게 될 수도 있다. 넉 달 넘게 단 하루의 휴일도 허락되지 않았던 팀에서의 내 경험도, 예능국의 고생담을 경쟁하듯 늘어놓다보면 저 아래 순위로 초라하게 밀려난다. 몸이 고장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생활이다.

▲ 예능국을 무대로 그려진 KBS 드라마 ‘프로듀사’ ⓒKBS

물론 그 PD의 암을, 오로지 격무만을 원인으로 돌리기엔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는 유독 요령이 없는 편이었다. 눈치껏 쉬어가며 해도 될 것을, 굳이 귀찮은 일 떠맡아 사서 고생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고생한 것을 너스레 섞어 티 조금 내는 것이 그나마 그가 부리는 요령이었다. 센스가 엄청 탁월한 편은 아님에도 선배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후배였던 것은, 그런 그의 성실함이 가장 큰 이유였을테다. 그런 그였기에, 몸이 조금씩 삐걱거린다 싶을 때도 애써 무시하며 젊음을 보험 삼아 별 일 아니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아무리 바쁜 팀에 있어도 눈치가 빠르고 손이 빠르면 요령껏 쉴 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요령과 눈치가 없는 대가로 건강을 잃는다면 너무 값이 큰 것 아닌가.

실은 그마저도 장담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알기로 그 PD보다는 훨씬 요령 있고, 자기 몸 챙길 줄도 알았던 다른 동료들도 연달아 수술 소식이 들려온다. 한 사람은 장을 이미 얼만큼 잘라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또 한 사람은 담낭을 제거한다고 한다. 이미 이런저런 병명으로 갑작스레 병원 신세를 지는 소식은 새로울 것도 없다. 일상적인 속쓰림과 편두통에 편집실마다 놓여있는 진통제는 흔한 풍경인데, 몸 어딘가가 고장 났다고 보내오는 신호를 민감하게 수신하기엔 일상적인 통증들이 심한 잡음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모두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풍경이다. 누군가 병원신세를 진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안타까워할지언정 놀라는 모습을 보긴 힘들다. 내가 그 PD의 암 소식을 듣자마자 떠올린 질문에 이내 대답이 따라왔듯, 모두들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 MBC ‘무한도전’ 촬영현장 ⓒMBC

일견,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광고는 한 달 동안 15초를 만든다. 영화는 1년 동안 120분을 만든다. 방송은 1주일에 80분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매주. 한 달로 계산하면 광고 1280편, 1년이면 영화 서른네 편을 같은 기간 동안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늦어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방송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분초를 맞추어 정해진 시간에 나가야 한다. 그 명제 앞에서 다른 모든 사정들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었음에도 맡은 분량의 종합편집을 끝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자막을 넣었다는 어느 선배의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개인의 피로나 정서는 아무런 이유가 못 된다. 방송국 사람들이 피도 눈물도 없어서가 아니다. 대형화된 프로그램들이 쌓아올린 시스템 앞에서 개인의 호의는 무력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무릎팍도사> 팀에 있을 때, 우리에겐 흔히 ‘초난강’으로 알려진, 일본의 방송인 ‘쿠사나기 츠요시’ 씨가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길어지는 녹화에, 그가 피로감과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일본의 방송제작 시스템은 이렇지 않다며 농담처럼 투정했던 기억이 난다. 무엇을 찍을지 기획단계에서부터 구체적인 수준까지 결정해놓고 제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촬영도 계획한 시간 안에 끝나고 편집단계에서도 일이 늘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시종일관 굉장히 예의 바르게 촬영에 임했던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로서는 꽤나 과격한 불평이었던 셈이다. 물론 철저하게 계획된 일본식의 제작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한국 예능만의 장점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결국 방송에 나가지 못한 그의 불평이, 내 기억에는 꽤 강하게 새겨졌다.

얼마 전 세월호 관련 영상을 만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스태프들을 모아 팀을 꾸렸다. 오전 촬영이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늦게 끝나, 분주히 장비를 챙기며 오후 촬영은 이것보다 쉬울 거라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스태프들에게 말했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이것보다 더 쉽다고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수월한 촬영은 처음이라며. 그 영상과 관련해서 들었던 말들 중에, 나로서는 제일 반가운 말이었다면 이상하게 들릴까. 세심하고 끈질기게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도 분명 멋진 일이지만, 그보다는 좀 더 즐겁게 일하고 싶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일 때는 더욱. 결국 시스템도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닌가. 부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방송이라는 일이, 이를 만드는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이 되지는 않길 바란다. 병마와 싸우는 동료 PD가 부디 잘 이겨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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