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간부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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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PD의 그러거나 말거나]

“술자리에서 잡담하는 분위기의 격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1TV에서 용납할 수 없다”

막 인기를 끌고 있던 한 스포츠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된 이유다. ‘용납’할 수 없었던 그분은 KBS의 권순우 편성본부장이다. 무려 편성본부장이다. (PD저널의 독자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방송사에서 편성본부장은 엄청나게 중요한 자리다. ‘용납’이란 단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프로그램의 존폐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이긴 하다.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다만) 경영과 편성의 분리라는 원칙이 지켜진다면 편성본부장은 사장보다 더 중요한 자리일 수도 있다.
[관련기사 : 편성본부장 한 마디에 편성 중단? ]

권순우 편성본부장은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전임 사장 시절 면전에 보직 사퇴서를 날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현 조대현 사장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한다는 소문도 있다. 방송사라는 조직이 원체 말 만드는 공장인지라 믿거나 말거나 식의 헛소문이 많긴 하지만, 여러 사람이 그녀의 강단(?)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 논란에 대한 대응도 정말 소문 속의 그분다웠다. 권 본부장은 기자에게 대놓고 ‘사적인 대화 자리 같은 방송 분위기’가 문제고 자신이 리뉴얼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노조에는 프로그램의 ‘퀄리티가 방송사고 수준’이고, ‘편성본부장이 퀄리티를 판단하고 (프로그램을) 몇 주 죽일 수도 있다’는 말까지 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난 그 프로그램 맘에 안 들고, 편성본부장인 내 맘에 안 드는 프로그램은 손볼 수 있어’라고 대답한 것이다. 정말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헛소문이 아니었다.

▲ 지난 1일 오후 KBS 신관에서 열린 수신료 기자회견에 KBS 간부들이 앉아있다. ⓒPD저널

“술자리에서 잡담하는 분위기의 격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1TV에서 용납할 수 없다”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까, 이 문장에는 권순우 본부장의 진심이 담겨있을 것이다. 이것이 KBS 편성 책임자의 진심이라서 정말 위험하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술자리에서 잡담한다. 때로는 시답잖은 농담도 하고 상스런 욕도 좀 하며 산다. 나는 그게 2015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이고 정서라 생각한다. 물론 방송이 평균적인 삶과 정서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격’이라고 여긴다면 도대체 방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회사에서 본부장급 이상의 고위 간부는 대체로 1980년대 초중반에 입사해 30년 남짓 회사에 다녔고 지금은 50대 후반인 분들이다. 대부분 고학력이고 중산층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갖춘 분들이다. 지상파의 전성기에 현업을 했기 때문에 딱히 제작비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다. 또 이른 연차에 데스크에 올라 제작보다는 평가와 지시가 더 익숙한 분들이 많다. 방송사의 특수성 때문에 정보도 많고, 문화적 감각도 뛰어난 편이다. 그분들의 인생이 특권이었다고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좀 특별하다는 이야기다.

경제적 여유, 사회적 지위, 정보와 취향까지... 대한민국에서 방송사 간부는 분명히 특별한 계층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정도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0% 아니 많아야 5% 남짓일 게다. 문제는 간부들이 그 5% 세상의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획일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유만만>을 기어이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바꾸고, 수많은 반대에도 이어령 선생의 강연 프로그램을 편성하면서도 프로야구 토크쇼에는 밤 12시 자리조차 줄 수 없는 게 지금 간부들의 인식이다. 그래서 젊은 제작자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젊은 시청자들은 KBS를 떠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뻥 차버리시니, 이 늙어가는 채널을 어찌하란 말이냐.

누구나 자기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자기가 속한 세상이 더 커 보이고 더 중요해 보이는 법이다. 방송사 간부들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하지만 방송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진 분들이니만큼 더 조심해야 한다. 후배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지 않았나. 시청자 중심, 시청자 중심. 간부님들도 자기들의 세상에서 나와 ‘시청자 중심’ 한번 해보심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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