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가 된 PD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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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가 된 PD이야기
[제작기] MBC경남 '경남아 사랑해-쑥대밭'
  • 김현지 MBC경남 PD
  • 승인 2015.06.27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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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생활 10년 차, 시골 논밭도 밟을 만큼 밟아봤고 제철 농산물도 먹을 만큼 먹어봤다. 방송쟁이들 다 그렇듯 얕고 넓게 아는 척하는 요령도 붙었다. 하지만 직접 농사를 짓는다면? 흙과 씨앗과 태양 아래선 ‘큐’, ‘커트’가 소용없었다. 나는 농사 까막눈이었다.

농사는 판타지가 아니다

▲ '쑥대밭'에 직접 출연하고 있는 최수연 스크립터(왼쪽)와 화유미 작가 ⓒMBC 경남

지난 1월. 저녁 매거진 프로그램 ‘경남아 사랑해’ 새 코너를 시작해야 하는데 리포터도 없고 돈도 없고 아이템도 없었다. 살펴보니 우리가 가진 건 달랑 PD, 작가, 스크립터 세 사람의 건장한 팔뚝과 끝없는 수다력 뿐. 당시 ‘삼시세끼’가 인기를 끌던 무렵이었고 부모님이 고추 농사를 지으시는 영농후계자 화유미 작가는 농촌에 대한 연예인들의 판타지가 거북하다 했다. “농사도 직업이다!”

마당 있는 집에서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아줌마 PD는 출산 후 뒤늦게 유기농, 무농약에 눈을 떴다. 게다가 흙을 만지면 아이들 정서함양에 좋고 삽질이 두뇌활동을 촉진한다는 이야기들이 떠돌면서 어쩐지 세계문학전집을 사는 마음으로 텃밭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래, 나도 땅만 있으면!”

만능 스포츠맨에 유니버셜한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인 최수연 스크립터는 무념무상에 가까운 초긍정 에너지로 두 여인의 외침을 받아쳤다. “그럼 짓죠, 농사.” 그렇게 한 달 가까이 표류하던 새 코너가 콩 구워먹듯 시작됐다. ‘쑥.대.밭’. 밭 중에 최악이 바로 쑥이 무성한 쑥대밭이라는데 우린 ‘쑥쑥 크고 대롱대롱 잘 열리는 밭’이라고 우겼다. 1년간 제작진이 직접 농사 지어 겨울 김장에 성공하는 게 목표. 함안 여성농민공동체 ‘언니네텃밭’의 최고참이신 황말순 언니가 콩밭 한 귀퉁이 10평을 선뜻 떼어주셨다. 그게 지난 2월이다.

밭은 요물, 밭학다식

밭이 생기자 만나는 사람마다 “언제 씨 뿌려요?” 이게 인사였다. 하지만 아직 땅도 하늘도 꽁꽁 얼었는데 무슨 씨를 뿌린단 말인가. 그럼 뭘로 방송을 내보내나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연장, 호미 이야기부터 먹어도 되는 퇴비 이야기, 상자로 밭을 만든 쿠바의 배고픈 아이디어나 할머니들이 지켜온 토종 종자와 글로벌 종묘사가 만든 자살 종자까지. 밭에서는 먹을거리만 나는 게 아니라 이야깃거리가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자라난다. 매주 분량이 넘쳐서 걱정이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흙을 밀치고 올라온 새싹들은 얼마나 대견한가. 초록이 사람을 이토록 흥분시키는 색인지 미처 몰랐다. 봄비 한 사발에 일주일새 밀림처럼 자라버린 둥글레의 저력은 말 못하는 식물들에게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겸손한 마음도 불러왔다. 촬영이 다 끝났는데도 밭에 더 남아있고 싶고 주말엔 온가족 앞세워 밭나들이 나서는 심각한 밭중독 상황. 원예활동을 원초적 쾌락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처음엔 리포터를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제작진이 직접 출연했는데 이젠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 재밌는 걸 남 시키고 카메라 뒤에서 보기만 했으면 어쩔 뻔했어.

방송사 옥상, 텃밭이 되다

농사를 다루는 많은 프로그램이 귀농∙귀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을 버리고 도시를 떠날 수 없다. 그림 같은 별장도 없다. 우리는 좀 더 현실을 그리기로 했다. 취미로, 운동으로, 부업으로 짓는 도시형 농사. 베란다에서도 옥상에서도 손바닥만하게 지을 수 있는 코딱지 농사. 어려우면 포기할 자유가 있지만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기 싫어지는 마성의 도시농. 그리고 시청자보다 제작진이 먼저 빠져들었다.

MBC경남 사옥 4층 옥상에 안 쓰는 가방, 스티로폼 박스 같은 온갖 재활용품들을 다 끌어 모아 만든 옥상텃밭. 회식하고 돌아가는 길에 식당 쓰레기통의 고추장통까지 들고 왔더니 온 회사에 ‘넝마주이’라고 소문이 났다. 비록 편집실은 고물상이 되었지만 이제 회사 옥상밭은 청소하는 아주머님들부터 사장님까지 모두가 좋아하는 핫 플레이스. 풍성한 쌈채소와 몇 알 안 되는 딸기를 나눠먹고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채소꽃들로 꽃꽂이도 한다. 작은 밭과 어리버리 농부들이 이렇게 즐거운 변화를 보여줄지 몰랐다.

오늘 아침 옥상 포대밭에서 감자를 한 무더기 캤다. 포슬포슬 찐감자에 우유 한 잔으로 강제 태닝한 내 몸에 상을 줄 차례. 여름을 기다리며 손톱만하게 달린 수박 열매에 애정을 쏟는다. 이제 장마철. 매일같이 선배 농사꾼 할머니들한테 잔소리 듣는 초보 도시농부들에게는 또 다른 시험기간이다. 쑥대밭 ‘덤 앤 더머’들은 가지와 오이, 토마토와 고추를 무사히 살려낼 수 있을까. 오늘도 ‘열공’(열심히 공부한다의 줄임말), 아니 ‘열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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