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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민 PD의 끼적끼적]

꽤 잘나가는, 소위 멘토로 불리던 이가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 적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전문 강사로 살아온 이였다. 늘 청중을 압도해야 했다. 청중을 압도하는 강사는 말에 망설임이 있으면 안 된다. 이론의 여지로부터 고개를 돌려야 한다. 그의 단언이 단정적이고 화려할수록 듣는 이들의 귀는 빨려들어 갔을 것이다. 물론 이 화려한 언변은 청중의 욕구도 함께 공명한 소리다. 멘토로 불리는 강사를 찾는 이들은 담백하고 담담한 강의보다는 스펙터클을 기대한다. 그 말들이 얼마나 조밀하고 진실들로 가득한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조금 허술하더라도 가슴을 뛰게 해주는 뜨거운 말이길 원한다. 무료한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이에게는 이 말들이 삶에서 꽤 큰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카메라 앞에서 버릇처럼 당당하게 내던진 그의 화려한 직언들이, 당연하고 사소한 MC의 반문 앞에서 한순간에 허우적거렸던 것은. 예능은 일방적인 강연이 아니었다. MC는 일방적으로 마음을 열고 그의 말들을 새기러 온 청중이 아니었다. 좋은 말, 맞는 말도 부딪히고 깎일 기회를 얻지 못하면 타성에 젖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 그가 늘 섰던 연단에서는 반론과 토론을 맞닥뜨릴 기회는 드물었다. 스스로의 말을 곱씹고 되짚어볼 여유가 없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MC의 반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그의 모습들은 대부분 편집되어 방송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 부분을 썩둑썩둑 썰어내는 입맛이 씁쓸했다. 결국 그는 여전히 훌륭한 멘토로서 전파를 탔다.

ⓒpixabay

나 역시도 강의 자리에 종종 불려 다녔다. 그것도 대학생 신분 때부터 그랬다. 주로 은사님들의 부탁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찾았다. 대학 시절 70명이 넘게 과외를 했으니 공부 노하우 같은 걸 정리해 달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리도 있었다. 아마 그런 얘기를 하는 명분은, 이른바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의 간판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테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딱 저거였다, 멘토. 그 때는 그렇게 보편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강사가 된다는 건 몹시 조심스러운 일이다. 목표와 성과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과외 교사가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수험생활에 지친 중고생들에게는 대학생이라는 이름 자체가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선망하는 학교의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학교 안에서 내가 정말 어떤 학생인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강단에 서는 순간 선망의 눈길을 받게 되고, 거기 서서 하는 말들은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달콤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위험하다.

심지어 PD는 어떠한가. 단순히 숫자로만 헤아려도 명문대생 보다 훨씬 희귀하다. 희귀한 만큼 그 이름을 바라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정보 역시 대학 입시시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현직 PD라는 이름표를 달고 강단에서 서서 하는 말들은, 중고생들 앞에 선 명문대생의 말을 훨씬 상회하는 환영을 받는다. 소위 ‘언론사 지망생’들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콘텐츠도 훨씬 다채롭다. 방송가 현장 뒷이야기나 연예인들 이야기는 심지어 한 두 다리 건너 들었을지언정 어쩔 수 없이 귀가 솔깃해진다. 한참 일할 때는 워낙 바빠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도, 시간이 생긴 뒤로는 PD라는 이름으로 연단에 설 일이 종종 생긴다. 실제 PD로서의 일을 얼마나 훌륭하게 해냈는가는 묻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마음을 활짝 열고 ‘멘토’의 입을 바라보는 예의 그 청중들과도 닮아있다.

그 때마다 대학시절 특강 강사로 섰을 때와 비슷한 아찔함을 느낀다. 행여 내가 함량이 한참 떨어지는 사람이어도, 저들 앞에서는 PD라는 이름 뒤에 숨을 수 있겠구나. 그건 정말 무서운 도취가 될 게다. 총총한 선망의 눈빛 그늘에 숨으면, 마치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취할 수 있다. 그런 허장성세에 젖는다면 분명 오래지 않아 눈빛을 반짝이던 그이가 그 눈빛만큼 빛나는 사람이 되는 동안, 나는 여전히 그늘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좋은 멘토의 말은 삶에서 스며나온다. 스스로 멘토를 자처하는 사람은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금세 허울만 남으리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는 마음으로 요청해 오시는 강의 자리들은 대부분 가려고 노력하지만, 연단에 선다는 것은 내겐 빚을 지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사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며 도전하는 강사들의, 예의 그 뜨거운 말들이 썩 달갑지 않기도 하다. 직업의 본질은 노동이다.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하고, 그만큼의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 모든 사람들이 가슴 뛰는 일을 하면서 살면야 좋겠지만, 그런 일은 너무 적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메일을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해야 하고, 누군가는 음식을 나르고 친절을 팔아야 한다. 실상 선택할 수 있는 대부분의 직업들이 이런 범주 안에 있고, 세상은 이런 직업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다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가지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 양 몰아가게 된다. 성실하게 직업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마치 패배자인 것처럼, 박탈감을 선사한다. 착취와 열정페이는 모두 이렇게 ‘노동으로서의 직업’이 소외되며 나타난다.

직업은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이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강조되는 것은, 삶에서 직업이 너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노동법이 규정하는 시간만큼 성실하게 돈을 벌고, 여가의 시간에 가치와 즐거움을 찾으면 된다. 자아는 거기서도 세울 수 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고 적당히 쉴 수 있다면, 사람들의 정서는 더욱 안정되고, 때로는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선거 때면 후보자들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건강한 시민으로 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건강한 사회다. 영웅도 멘토도 롤모델도 필요 없다. 선망하는 눈빛의 청중들 앞에 서서 삶의 열정에 대해 설파하다보면 말하는 이도 고양되기 마련이다. 그 달아오른 언어로 자신의 우연한 성공에 올라서서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선사하지는 않기를, 또 다른 강의를 앞두고 스스로를 재차 타일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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