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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2월 단상(斷想) 셋

Ⅰ. 전화 - 애(愛)지역민방의 PD협회장 한 분이 전화를 했다. IMF한파로 지역민방의 여건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사정을 들었다. 그리고 전체 30여명의 프로듀서 중 11명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해주었다.그들 중엔 창업공신도 있고, 공채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차마 그들을 차가운 길거리로 내몰 수 없었던 동료들이 한사람당 월 50만원씩이라도 지원하기로 하고 기금 모으기에 나섰다. 어떤 이는 적금도 깨고, 또 어떤 이는 융자도 받았다는 얘기는 감동적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보살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버림받은 이들에게 50만원이란 돈이 과연 도움이 될지는 차지하고라도 따뜻한 동료애가 전화로 전해져 왔다.어려운 시대다.그럴수록 따뜻한 가슴이 필요할 것이다.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선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이 필요하다.Ⅱ. 카멜레온 - 욕(欲)사전적 의미로 노블레스(Noblesse)는 ‘귀족, 귀족계급’을, 오브리제(Oblige)는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로 되어있다. 새로운 정치환경에 따라 지금 자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의 정치권 줄대기가 빈번하다는 얘기를 들으며 문득, 이 단어를 떠올렸다.‘귀족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브리제는 유럽의 귀족이 자신의 지위를 누리기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음을 말해준다.전쟁터에서 맨 앞장서는 희생정신과 솔선수범, 높은 도덕성으로 인한 존경심이 없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그런데, 우리는 어떨까.천박한 촌뜨기들이 스스로 귀족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려만 한 건 아닐까.책임져야 할 부분에서는 그 많은 귀족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그리고 세상이 바뀔 때마다 권력과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말 바꾸기, 색깔 바꾸기로 카멜레온처럼 살아남는다.당당함을 지닌 귀족의 자태가 아쉽다.소신과 자부심을 지니고, 물러날 때 깨끗이 물러나는 방송인이 보고싶다.Ⅲ. 마음 비우기 - 공(空)기존의 30여 개 실국조직을 10개 이하로 줄이는 시안이 한 방송사에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노동조합조차 그 안을 보고 놀랐다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경외감까지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논의절차를 진행했기에 이해관계와 구성원들이 복잡한 방송사에서 그런 안이 도출되었을까.궁금해서 물었다. 주체는 각 직종을 대표한 차장급들이었다. 그들은 직종의 이해관계를 떠나 마음을 비우고 회사전체의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안을 던져놓고 돌아와서 자기 직종사람들한테서 비난까지 받았다는 뒷 얘기도 들리는 걸 보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잣대로 자신이 속한 부서의 입장에서 시작되는 변화와 개혁은 늘 좌절하기 마련이다. 이번 정부조직법의 인사처, 예산처 파동도 그렇고, 공보처의 집요한 살아남기 공작(방송행정업무가 방송법이 통과될 때까지 ‘한시적’이란 조건을 달고 문화부로 이관되었다)이나 자꾸 뒷걸음치는 방송법 개정논의, 몇몇 방송사의 광고직접수주운동, 근본개혁에 반발하는 각 방송사 내부구조, 모두가 그렇다.그래서 앞서의 구조조정안은 신선하다기보다 오히려 존경스럽다.정치권도, 방송사 내부도 마음 비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방송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당선자의 약속이 정권논리와 당리당략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방송사 내부개혁이 자기 이기주의나 자리보전을 위해 그 정신이 희석되어서도 안된다.지금 만들어진 그 안이 앞으로 어떤 결론으로 도달할지 알 수 없지만 ‘마음 비우기’로 이루어낸 그 결과물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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