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과학이 뭘 어쨌다는 건가”
상태바
“그래서, 과학이 뭘 어쨌다는 건가”
[제작기] EBS ‘한 컷의 과학’
  • 김진희 EBS PD
  • 승인 2015.07.27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EBS ‘한 컷의 과학’ ⓒEBS

과학을 소재로 한 위클리 방송 EBS <한 컷의 과학>이 다섯 달 째 방송 중이다. 기획 기간까지 포함하면 반 년 넘게 매일 과학을 생각하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기간 동안, 가장 집요하게 과학을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다. 나를 포함하여, 전체 문과 출신인 제작진은 앞으로도 인생에서 이렇게 뜨겁게 과학을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거의 확실히.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암기 과목' 과학을 깡그리 잊는 일. 그것이 한국에서 입시를 위해 과학을 공부한 대다수 문과 출신의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내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는 “그래서, 과학이 뭘 어쨌다는 건가”하는 것뿐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한 컷의 과학>의 출발이었다.

‘과학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과학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까닭은 나와 도무지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을 억지로 알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진은 우선 과학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해줄 접근법을 찾고 싶었다. 멘델이 완두콩을 심고 심어 족집게로 하염없이 수분을 시킨 멋 옛날의 일이 도대체 뭐 어쨌다는 것인가? 그것이 현대 유전학의 시초였고, 덕분에 유전자지도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그래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설득이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을 원천적으로 치료해낼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시청자를 유혹해 보는 일. 세계 전쟁에서 판도를 바꾼 무기 속에서 물리의 원리를 찾아보고, 외계인이 과연 지구를 침공해 올 것인가 하는 질문의 답 속에서 아주 슬쩍 블랙홀의 개념을 맛보는 일처럼 말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것이 우리가 '과학도 어쩌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택한 접근법이었다.

여기에서 유용했던 건 제작진 그 누구보다도 뒤떨어진 내 과학 상식 수준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과학에 흥미가 없는 학생이었다. 그러니 프로그램 한 편 한 편을 만들어 나가며 만나는 과학 지식은 그야말로 신세계. 다행히 작가진은 비교적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꾸려졌기에, 나와 작가진, 또 작가진과 과학 전문가들 사이의 '지식의 격차'는 <한 컷의 과학>이 매주 15분간 지속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언뜻 무식하고 무례하게 비춰질 수 있는 인터뷰 내용과 방식이 <한 컷의 과학>의 개성있는 톤이 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느낌을 '위트 있고 조금은 키치적인' 것으로 잡았다. 사진은 <한 컷의 과학> '뇌의 목소리, 뇌파' ⓒEBS

과학 전문가를 모시고 상식 이하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모두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개념들을, 진짜로 알아보고 싶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뇌파' 분야 교수님을 모시고, '그래서 뇌파가 뭐라는 건지'를 집요하게 물었다. '뇌의 일어나는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전위 변동을 기록한 것이 뇌파'라고 답하시면 '뇌가 활동을 하는 게 그림으로 그려진다고요?' '전위는 또 뭡니까'하고 되묻는 식이었다. 녹화 현장에서는 정말로 내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 까지 물었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전문 용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과학 무지렁이의 귀에도 잘 들리는 문장을 이끌어 내는 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지면을 빌어, 땀까지 흘려 가시며 뇌파가 무엇인지를 (끝끝내) 알려주신 임창환 한양대학교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언뜻 무식하고 무례하게 비춰질 수 있는 인터뷰 내용과 방식이 <한 컷의 과학>의 개성있는 톤이 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느낌을 '위트 있고 조금은 키치적인' 것으로 잡았다. 여기서 <한 컷의 과학>의 대표 이미지인 '손그림 스톱모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 편, 도입부에서 소재를 소개하고, 중반부에서 관련된 핵심 과학 원리를 설명하는 '손그림 스톱모션'은 흰 종이에 매직으로 쭉 쭉 그려나가는 그림을 수천 장의 스틸 사진으로 촬영해 후반에서 편집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매끈하게 만들어진 고급 CG가 지금까지 과학 프로그램의 중요한 이미지였다면, <한 컷의 과학>에서는 그걸 손으로 그리고 찍는다. 재기 넘치는 손 그림으로 '어쩌면 과학을 이해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 <한 컷의 과학>의 대표 이미지인 '손그림 스톱모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EBS <한 컷의 과학>'내겐 너무 예쁜 기생충'편 ⓒEBS

그럼에도 잊지 않고 싶은 것은, 과학을 마냥 일상에서의 실용성의 잣대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기획단계에서 제작진을 매료시킨 건 과학이 갖는 신비로움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우리가 흔히 쓰는 GPS를 가능케 했다는 실용적인 사실을 넘어서,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 시공간을 새롭게 이해한다니, 정확히 그게 무어냐고 물으면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전문가들에게 물었음에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설프게나마 상대성이론에 가까워지는 순간, 어느 한 순간 느끼게 되는 신비로움. 나보다, 우리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주는 신비로움 같은 것 말이다.

짧은 과학 이야기 <한 컷의 과학>을 통해 한 순간이라도 시청자와 과학의 신비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면, 레귤러 과학 프로그램이 전무한 상황에서 출발한 <한 컷의 과학>이 제 몫을 한 거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 스스로에게 자랑도 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