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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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PD의 그러거나 말거나]

1년 전, 길환영 사장 퇴진 투쟁이 한창이었을 때 나는 노조 집행부에서 말직을 맡고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말직이었다. 11명의 집행부 중 서열이 딱 11번째였다. 덕분에 집행부 행세를 하면서도, 징계의 위협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럼에도 무서웠다. ‘이러다 해고되는 거 아닐까...’ 싸우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집행부 막내도 해고를 걱정할 만큼 작년 싸움은 치열했다. 노조는 노조대로 길 사장은 길 사장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싸움이었다. 사장의 해임으로 끝나 천만다행이지만, 만약 그때 싸움에서 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아마 언론노조 KBS본부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을 것이고, 비록 11번째 말직이지만 나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거다.

워낙 치열했던 싸움이라 그런지 1년 전 그 싸움을 잘 잊히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그때의 상황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 평소 치밀했던 길환영 전 사장이 그 싸움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실수를 했을까? 대국을 끝내고 복기를 하듯, 그 싸움의 과정을 한 수 한 수 돌아보곤 한다. 아직 명쾌하게 정리하진 못했지만, 어렴풋이나마 중요했던 사건들이 무엇인지는 알 거 같다.

▲ KBS 구성원들이 지난해 6월 28일 오후 3시 30분부터 KBS이사회가 열리는 길목에서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 가결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 ⓒ언론노조 KBS본부

무엇보다 아이들의 죽음이다.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유가족들이 회사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 분들이 청와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장담컨대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승리는커녕 싸움에 나서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이들의 죽음은 길환영 사장 해임 투쟁의 시작이자 끝이고 전부다. KBS가, 우리 모두가 아이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머지 사건은 모두 먼지처럼 가벼운 것들이다.

하지만 그 먼지처럼 가벼운 일에도 경중은 있다. 싸움의 과정을 찬찬히 복기해 보면 투쟁 초기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한 막내 기자가 총회에서 한 발언이었다. 팽목항 현장을 취재했던 그는 ‘기레기’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심정을 절절히 토해냈다. 슬픔과 분노로 범벅된 막내의 발언은 많은 선배들을 울렸고 망설이고 있던 사람들을 싸움에 현장으로 불러냈다. 그 기자의 이름은 강나루. 유투브에서 당시 총회 발언을 볼 수 있다.

그로부터 5일후인 5월 19일,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벌어진다. 그날은 김시곤 보도국장의 폭로 이후 갑자기 휴가를 냈던 길환영 사장이 복귀하던 날이었다. 길환영 전 사장은 많은 직원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문 진입을 강행했다. 사실 KBS에는 수많은 입구가 있다. 제 아무리 많은 직원들이 막는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환영 사장은 정문을 택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자진사퇴하지 않고 버티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직원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격렬한 저항 끝에 길환영 사장의 차량은 도망치듯 돌아갔다.

얼마 전 회사는 길환영 사장의 차량을 막아섰던 직원 9명에게 징계를 내렸다. 징계의 수위도 만만치 않다. 노조 집행부 4명에게 정직 4개월, 일반 조합원에게는 정직과 감봉의 징계가 내려졌다. 강나루 기자도 정직 2개월을 받았다. 사건이 벌어진 지 14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회사는 검찰의 사법처리 결과를 기다렸는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징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검찰의 조사는 시작되었다.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처장이 줄줄이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았다. 그래, 이것은 기막힌 우연일 뿐이다. 어차피 우리는 녹색도 흰색으로 보이는 우연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 조대현 KBS 사장이 1일 오후 KBS 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PD저널

이제와 새삼스레 징계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 정도의 비정상은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KBS에서 수없이 많았다. 다만 지금의 KBS가 억울하다. 뉴라이트 출신 이사장이 도를 넘는 요구와 그것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사장,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망명을 요청한 날짜가 틀렸다고 관련 보도라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는 인사 폭거, 국정원 도청 건이 태풍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메인뉴스까지 KBS는 하나도 정상화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장은 뭐가 그리 급한지 일방적으로 ‘광복 70주년’ 아젠다를 밀어붙이고 있다. 길환영 사장 시절과 다를 게 없다. 1년 전, 아이들의 죽음으로, 현장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던 막내 기자의 울분으로, 해고를 각오하고 싸웠던 노조 집행부의 결기로, KBS 정상화를 원했던 수많은 직원들의 열망으로 만든 가능성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나는 그게 뼈아프고 억울하다.

징계는 일종의 경고다. ‘KBS 정상화는 꿈도 꾸지 마라’는 메시지다. 그래서 징계를 결정한 본부장급 간부들 그리고 징계 문서에 최종 사인을 한 조대현 사장에게 묻는다. 1년 전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피켓 한번 든 적 없고, 구호 한번 외친 적 없는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투쟁의 과실을 독점하는가! KBS가 정상화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다 파괴하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명심하시라. 권력을 향한 질주는 사람의 시야를 좁게 하고 판단력을 흐린다. 이병순 전 사장, 길환영 전 사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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