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일에도 무조건 참아야 했던 독립PD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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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PD협회 등 ‘방송사 갑질관행’ 문제 제기···“현장 PD들 나선 건 처음”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인 김경수 PD(가명)는 협찬 상품의 직접광고를 거부했다가 방송사로부터 일방적인 제작사 교체를 당했다. 교체 사실도 방송사에게 직접 통보를 받은 것이 아니라 대신 제작을 맡게 된 타제작사의 후배 PD를 통해 알게 됐다. 당황한 김 PD가 연락을 하니 방송사에서는 그제야 “그렇게 결정됐으니 이번 일만 하고 그만두라”고 통보를 했다. 더 황당한 건 이후의 일이었다. 방송사의 담당 부장이 새로 일을 맡게 된 제작사에 연락해 “제작사 교체 사실을 누가 김 PD에게 알려줬는지 알아내서 자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부장은 김 PD에게 말을 전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앞으로 일을 주지 않겠다고 제작사를 협박했다.

이주원 PD(가명)는 PD 입문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절, 방송사 소속 상급자 PD에게 폭행을 당했다.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PD는 아무런 저항도 반발도 할 수 없었다. 계약직 조연출이 본사 PD에게 대들었다는 게 알려지면 조직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이 PD는 어차피 이슈화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해 병원 진단도 받지 않았다. 가해자는 폭행 다음 날 이 PD에게 사과했다. 이 PD는 사과를 받아들이고 가해 PD와 다시 친하게 지냈다. PD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가해 PD와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PD는 “무조건 참아야 해서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 외주제작 프리랜서 PD 노동 인권 실태 증언 영상. ⓒ한국독립PD협회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 PD들의 노동인권실태 증언을 듣고 대책 마련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 노동인권 실태 긴급 증언대회’가 열렸다.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독립PD협회가 주최한 이번 증언대회는 지난 6월 24일 MBN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독립PD가 MBN의 담당 PD에게 폭행당한 사건을 계기로 마련됐다. 참석자들은 방송사 외주제작 구조의 문제점과 관련 종사자들의 열악한 노동인권 실태를 짚어보는 한편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증언대회에서는 외주제작 프리랜서 PD들의 노동인권실태 증언 동영상이 상영됐다. 앞서 독립PD협회는 MBN에서 일어난 독립PD 폭행사건을 ‘종속적인 갑을관계에서 비롯된 횡포’로 규정하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마련을 촉구해왔다. 상영된 동영상 속 프리랜서 PD들의 증언은 독립PD 폭행사건이 ‘단순 폭행사건’이 아니었다는 독립PD협회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얼굴과 이름, 목소리를 숨긴 채 증언해야만 하는 현실도 이를 증명했다. 프리랜서 PD들은 일방적인 제작사 교체, 정규직 PD의 독립 PD 폭행, 협찬사 광고 강요, 부당한 시사 관행, 저임금과 노동 착취 등 방송사의 이른바 ‘갑질’ 관행을 폭로했다.

동영상을 소개한 복진오 독립PD협회 권익위원장은 부당한 일을 겪어도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독립PD들의 현실을 설명했다. 복 PD는 “그 동안 외주 독립 PD들이 불합리한 일을 많이 겪어 왔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증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그만큼 보복과 불이익이 엄청 났다”라고 밝혔다. 이어 “폭행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에 특히 더 분노했지만, 폭행이 아니더라도 제작과정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그런 문제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공론화되어 논의의 장이 마련되도록 포기하지 않고 싸우겠다”라고 전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방송사 외주제작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와 노동인권 보장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 노동인권 실태 긴급 증언대회’가 열렸다.ⓒPD저널

발제를 맡은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는 방송법 내 독립제작사의 법적 지위 규정 부재, 종편의 정규직 PD 개인에 의한 고용 구조와 조직 문화, 불규칙한 편성으로 인한 부담 증가와 종속 심화 등을 지적했다. 이어 △독립 제작사에 대한 법적 지위 부여를 통한 고용 지원책 마련 △지상파 방송사들의 고용계약서 및 표준계약서 작성 의무화 △독립PD들의 협동조합 설립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김 강사는 특히 정규직 노조의 역할을 강조하며 태도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 강사는 “방송사와 정규직 PD들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조직화는커녕 실태조사조차 하기 어렵다”며 “언론노조 소속원들이라도 앞장서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같은 연대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에게 베푸는 혜택이나 양보가 아니다”라며 “한국 방송 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의존성이 이미 커진 상황에서 독립PD들을 사회적 약자로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각보다는 충분한 실력을 가진 동지로서 존중하는 자세가 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선영 독립PD도 방송 독립제작 인력에 대한 뿌리 깊은 인식과 관행을 지적했다. 최 PD는 “관료화된 방송사, 특히 종편의 위계적 질서와 성과에 따른 상벌제는 갑을관계를 고착화한다”며 “결국 동료들끼리도 경쟁하는 체제가 되고 자기 노동 착취 구조까지 생긴다”고 비판했다. 이어 “MBN의 독립PD 폭행사건에서 피해PD가 저항하지 못했던 것도 이 같은 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독립제작사 및 독립제작 인력 관리 지침 마련 △표준계약서 작성 의무화 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방송사의 불공정 행위를 익명으로 고발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동기 독립PD협회장은 “독립PD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익명으로밖에 증언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방통위 산하에 익명으로 불공정 행위 고발을 접수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고, 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방송사 재허가승인 과정에 반영하는 방안이 있다”라고 제안했다.

▲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 노동인권 실태 긴급 증언대회’에서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가 방송사 외주제작 구조개선 및 노동 인권 보장방안에 대한 발제를 하고 있다. ⓒPD저널

이른바 ‘MBN법’ 제정을 추진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복진오 권익위원장은 “MBN 폭행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심각한 폭행이나 인권 침해가 있어도 사회적 합의가 강요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합의된 사안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구가 직권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 당사자가 아닌 가해자가 소속된 방송사에 관리책임 부실을 책임지도록 하는 법을 추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한 은수미 의원은 증언에 나선 PD들에게 “힘든 일인데 용기를 내줘서 감사하다”며 “무너진 삶에 비해 많이 늦은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을 출발선으로 생각하고 함께 하겠다”고 전했다.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도 “오늘 기회를 통해 방송영상에 종사하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용기 내어 발언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며 “이를 통해 비정규직 차별 문제, 인권 유린 문제 등이 하나 둘 해결되어 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독립PD협회는 앞으로 ‘MBN법’을 추진하는 한편 추후 MBN 재승인 과정에서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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