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한 비밀’이 비밀로 남을 수 있었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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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상영작 ‘공공연한 비밀’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마음이 갑갑했다. 아동성범죄 이야기, 그것도 할리우드 유명인사들이 가해자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라니. 상영을 앞두고 마음이 불편했던 건, 영화를 보는 내내 얼마나 열이 뻗치고 속이 터질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원제 An Open Secret, 감독 에이미 버그)을 보는 100분간, 의외로 나는 크게 놀라지도 격분하지도 않았다. 물론 푹푹 한숨을 연신 내쉬어야 했지만, 영화 속 일들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는 13살짜리를 성폭행하고 외국으로 도망간 영화감독에 대한 구명운동이 펼쳐지고, 애인이 입양한 미성년 딸과 잠자리를 갖고 결혼까지 한 감독이 거장으로 추앙받는 곳이 아닌가. 아니, 그보다는 나 자신부터가 학교에서조차 성추행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국가, 아동성범죄자들에게도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관용적인(!) 국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요지경 같은 할리우드에서 아동성범죄가 만연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 영화 <공공연한 비밀> 포스터. ⓒAn Open Secret

정작 소름끼쳤던 건 영화가 아니라 이런 나의 무감각함이었다. 영화가 폭로하는 할리우드의 추악한 이면에 크게 충격 받지 않는 나의 모습이 되려 충격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아동성범죄의 희생자였던,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용기 있는 고백에 나는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감독 에이미 버그는 이 영화를 만들고도 한동안 상영을 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할리우드 거물들이 배경에 있는 만큼, 혹여 불이익을 받게되진 않을까 배급사들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피해자가 카메라 앞에서 신상을 밝히고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하기까지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영화가 폭로한 것은 단순한 아동성범죄가 아니라 권력관계에 기반한 지능적이고 악질적인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 특히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아이들이 할리우드에서 권력을 가진 어른들의 ‘착취’에 저항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어른들은 이 착취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그 바닥은 원래 그래”,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야”라는 말로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한 피해자는 말했다. 사건 당시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잘 알지 못했지만, 점차 커가면서 심리적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게 됐다고. 과거의 그 경험이 어떤 의미였는지, 자신이 권력관계에서 어떻게 착취당한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많은 피해자들이 자살충동, 마약,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공공연한 비밀’이 계속 비밀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 더러운 진실을 보고 싶지 않아한 방관자들 때문이었다. 방관자들이 못 본 척 하는 사이 피해자는 늘어갔고, 피해자들은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어 고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드러난 건 여전히 빙산의 일각이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고, 심지어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 영화 <공공연한 비밀>

결국 ‘공공연한 비밀’을 폭로한 건 피해자들 자신이었다. 매니저로부터 몇 년에 걸쳐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던 에반은 폭로의 대가로 아티스트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버렸다. 에반은 비밀을 안고 끙끙대며 살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인생을 건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러나 ‘공공연한 비밀’에 대한 책임에서 제 3자는,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 역시 “세상이 그렇지 뭐”라고 생각했지만, ‘원래 그런 것’이란 없는 법이다. 영화 속 사건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였기에 더 추악했지만, 우리 주변에만 해도 권력관계에 기반한 부당한 일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 ‘공공연한 비밀’에 너무나도 쉽게 모르는 척 눈을 감는다.

“모든 것은 관객에게 달렸다”라는 영화 속 한마디가 와 닿았던 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비밀’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공연한 비밀’은 방관자들이 있는 한 계속해서 비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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