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세상보기 첫번째 문화읽기 3 - 가부장제의 도전앞에서 표류하는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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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순정파의 감상·냉소파의 위악 넘어야
고미숙
<문학평론가>

|contsmark0|남근우월주의의 가열찬(?) 행진97년은 어느 때보다도 가부장제의 담론이 번성한 한 해였다. 순진무구하게도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자리를 복원하고자 했던 ‘아버지’(김정현)를 시작으로 하여, 중세적 논리로 무장한 뿌리깊은 로컬리즘(영남 우월주의)이 전투적인(?) 가부장제로 분식된 ‘선택’(이문열)을 거쳐, 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부박함이 마침내 파시즘에서 그 정서의 거처를 마련한 ‘인간의 길’(이인화)에 이르기까지, 남근우월주의는 말 그대로 기세등등하게 이어졌다.그렇다고 해서 뭐, 그닥 개탄할 것만은 아닌 것이 한국적 반페미니즘은 워낙 네안데르탈적이어서 그 수확이 풍성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예컨대, ‘아버지’에서 ‘인간의 길’에 이르는 이 행로는 허구적인 가족애와 전근대적 윤리, 그리고 파시즘적 영웅주의가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조화롭게 동거하고 있음을 멋지게 계몽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런 담론들이 단지 논쟁의 차원에서 설득, 조정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근우월주의가 하나의 담론으로서 의연히(?) 자신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그 저간에 ‘일하는 여성’과 ‘사랑받는 아내’라는 두 가지 코드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성차별적 분업화에 기초한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오히려 90년대 초반 페미니즘이 위세를 떨치면서 마치 그런 왜곡된 현실이 상당히 변화된 듯이 여겼던 환상을 깨뜨려주었다는 점에서 가부장제의 포화는 차라리 고무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가부장제의 전방위적 공세 앞에서 바리케이드 이편에 있는 페미니즘 진영은 과연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올해 독자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공지영의 ‘착한 여자’와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걸기’를 바로미터 삼아 탐색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contsmark1|‘착한 여자’의 순정 - 낡은 표상체계로의 환원‘착한 여자’는 오정인이라는 여성의 두 번에 걸친 사랑과 실패,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주로 인테리 여성을 내세웠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고졸 출신에다 시골 우체국 직원이라는 초라한(!) 주인공을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단 여성 억압의 현실을 더 깊이 천착하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작용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성 내부에서도 지적 기득권조차 박탈된, 그래서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을 통해 성적 차별의 두터움을 부각하고자 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의도를 배신하고 말았다. 문제는 두리뭉실해졌고, 연애의 멜러성은 짙어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학벌이 아니다. 주인공이 거듭되는 불운에 접하면서도 지적 각성의 과정을 별로 밟지 않는다는 점이 더 문제적이다. 이것은 지식인(혹은 지적인) 여성을 내세웠을 때 부딪쳐야 하는 여러 예각화된 물음들을 우회할 수 있는 명분으로 기능하게 된다. 요컨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반성적으로 또는 사회적 맥락에서 보아야할 부담(?)에서 벗어나 있는 한 여성이 겪는 고난이란 사랑의 맹목적 헌신성과 그 좌절의 주관적 쓰라림만이 부각될 따름이다. 소설 전반에 깔린 주술적 분위기 - 무당의 예언, 자명스님의 개입, 여인들의 자살 - 도 그러한 면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따라서 이 소설은 한 불우한 여성이 현실에 발을 딛고 어떻게 남성중심적 세계의 폭력성을 극복해 가느냐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비극적인 여인이 그 운명의 주술에 긴박되어 남자에게 거듭되는 버림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구원된다는 공식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그간 대부분의 남성중심적 소설에 나오는 여성형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비극적인 운명을 지녔고, 한 없이 순결하며 무엇보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공지영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 순정파 여성. 이 여성이 구현하는 여성성이란 아름답고 헌신적인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남성들이 여성에게 부과하고자 하는 고전적인 표상체계가 아니던가?그리고 일단 이러한 표상체계에 포섭되어 버리면, 아무리 디테일의 세련성을 추구한다 해도 낡은 이항대립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바, 여기서도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순결한 여성과 속물적인 남성, 정인의 여성다움과 다른 여성들의 불모성, 천박하고 속물적인 남성(현준이나 호영)과 아버지같이 자애로운 남성(명수) 등등.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신파조의 대사와 장면들은 바로 이러한 이분법과 안짝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녀가 ‘돌아서 아주 멀리 돌아서’ 발견했다는 명수에 대한 사랑은 삶의 동반자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한 남성으로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유년기로의 퇴행에 다름아닌 것이다. 과연 이런 여성이 이 험난한 세기말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을까?위악적 ‘냉소’, 그 공허한 비상‘타인에게 말걸기’에 나오는 여성들은 우선 몸놀림이 지극히 경쾌하다. 대체로 30대의 캐리어 우먼에 속하는 이들은 운명의 비극적 그림자를 끌고 다니지도 않고, 80년대 변혁운동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가족이나 집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지극히 단자화된 삶을 영위한다. 또 공지영의 주인공이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는, 여성다움이 흘러넘치는 유형이라면, 은희경의 주인공들은 특별한 미모나 개성을 지니지 않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익명화된’ 개체들이다. 많은 경우 고유한 이름이 없이 ‘그녀’ ‘여자’ 등으로 불리는 것도 바로 개별적 삶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거부하고자 하는 소설적 전략이다.그러면서도 이들 역시 ‘착한 여자’와 마찬가지로 연애가 삶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파헤쳐 지는 것은 낭만적 사랑의 속물적 이면이다.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하고도 특별한 사랑’은 지극히 파편적인 우연의 산물일 뿐이고, 불륜이라든가 이혼이라는 심각한 관계도 뒤집어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는 삶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여자들은 속절없이 남자들을 사랑하는가? 부질없는 집착 혹은 습관의 내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집착을 벗어던지기만 하면 사랑이라는 주술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터, 과연 그렇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행하는 일탈적인 연애행각은 사랑에 대한 모든 환상을 삶의 저편으로 보냄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투(?)의 일환이다.이런 여정을 거친 여성들은 이제 나비처럼 가볍게 가부장제의 영토를 날아오른다. 그녀들은 정조를 지킬 필요도, 순결해 보일 필요도, 굳이 아름답게 보일 필요도 없다. 사랑의 순정성을 한껏 조롱하는 위악적인 여성들!그러나 이 여성들의 항로에는 커다란 함정이 놓여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녀들이 자유를 누리는 대신 삶의 에너지를 소거해버리는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과 함께 사랑이 근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동적 힘도 증발시켜 버리고 만다. 즉, 이들의 연애는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고착화하는 데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세번째 남자’에서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부터는 다 똑같다는 ‘그녀’의 깨달음(?)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따라서 이들이 행하는 남성편력은 진정으로 속물적 일상을 넘는 탈주의 선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이들이 누구보다 속물적 권태와 일상의 견고함을 가장 잘 견디고(혹은 누리고) 있다는 점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속물적 권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때때로 일탈적 연애행각을 벌이는 삶, 그것은 가변적이고 변덕스런 근대적 삶의 유동성에 그대로 몸을 맡기는 것에 다름아닌 바, 이 여성들이 ‘타인에게 말걸기’에 실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런지. 삶의 에너지가 소거된 채, 탈주의 행진을 멈춘 인물들이 행하는 냉소란 그저 뒷북을 치면서 어긋장이나 놓을 뿐, 자신을 포함한 타인의 삶의 근저에 육박하여 그것을 뒤흔들어 놓기에는 역부족이 아닌가 말이다.
|contsmark2|에필로그공지영과 은희경의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가 한 편 있다. 지난 해 개봉되었던 ‘안토니아스 라인’이 그것이다. 이 영화의 파격은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가계가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부계중심의 족보에 대한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가진 한국적 현실에서 어머니와 딸들로 이어지는 가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게다가 이 여성들이 꾸려가는 공동체는 남성에 대한 적대감 혹은 피해의식 같은 이항대립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여성성은 결핍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되어 역동적 생성의 선을 이룬다. 동성애자, 장애인 같은 주변적 인간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사랑과 섹스, 노동과 축제가 융합되는 해방의 공동체! 어떤가? 이제 우리의 페미니즘도 순정파의 감상이나 냉소파의 위악을 넘어 이처럼 에너지가 흘러 넘치는 전복적 영토를 공략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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