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범수 PD의 그러거나 말거나]

“편집실에서 우당쾅쾅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튀어 나와서 도망을 가네. 그 뒤를 다른 한 사람이 의자를 들고 쫓아가는 거야. 알고 봤더니 도망가는 사람이 선배고 쫓아가는 사람이 후배였어. 시사를 하다가 후배가 선배를 받아버린 거지. 내가 KBS에 입사해서 처음 본 장면이 그거야.”

1997년 회사에 들어온 한 선배의 경험담이다. 이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그때마다 왠지 이 싸움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술을 마시고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뭐 이런 식의 결말 말이다. 의자까지 동원된 난투극이 정말 낭만적으로 끝났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KBS에서 후배 PD가 선배에게 반항했다는 레퍼토리는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그 이야기의 결말이 대게 ‘술 먹고 풀었어’로 끝난다. 싸우다가 술 먹고 화해하고, 싸우다가 술 먹고 화해하고의 무한 반복. 정말 구태의연한 스토리다.

▲ 방송사를 무대로 한 KBS 드라마 '프로듀사' ⓒKBS

최근 KBS에는 그 구태의연한 스토리가 사라졌다. ‘00이가 XX선배와 크게 한판 붙었더라’, ‘00이가 국장한테 대들었다’는 식의 무용담(?)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선배와 후배가 대놓고 싸우는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선배와 후배 모두 느끼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예전처럼 선배를 신뢰하지 않고, 예전처럼 후배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 선배들은 ‘후배들이 말만 많고 프로그램은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후배들은 ‘선배들이 부속품처럼 부려 먹기만 한다’는 불만을 토한다. 다들 애써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곧 끊어질 줄처럼 팽팽한 긴장 상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핵심은 프로그램 권력이다. 누가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것이냐의 문제다. 프로그램의 콘셉트는 무엇인가, 타깃 시청층을 누구로 잡을 것인가, MC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등등. 하나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수많은 결정의 연속이다. PD는 결정을 하고 그 성패에 대한 책임을 진다. 실패하면 좌절감이 크지만 반대로 성공하면 희열감이 대단하다. PD들이 기를 쓰고 자기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KBS에서는 후배PD가 프로그램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결정권이 없다보니 자기 프로그램이라는 애착을 갖기도 어렵다. 당연히 제작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후배들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선배들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후배 PD들이 느끼는 또 다른 감정은 불안이다.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야 선배와 후배 모두에게 있지만 후자가 훨씬 더 강하게 느낀다. 위기의 핵심인 젊은 시청층의 이탈을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배우자나 연인 혹은 친구들이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 PD들이 모이면 ‘언제 회사가 망할까’, ‘회사가 망하면 우리도 잘리겠지’, ‘구조조정을 당하면 뭐하지’ 등이 중요한 대화 주제가 된다. 이런 불안감은 선배들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젊은 시청자들 다 떠나는데 선배들은 낡은 취향과 기준으로만 프로그램을 보니 회사가 안 망하고 배기겠냐.’

선배들도 후배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권이 없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작년 초에는 위에서 꽂은 MC 한명을 바꾸지 못해 본부장이 교체됐다. 윗분이 지시한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할 PD를 찾는 일이 요즘도 국장, 부장들 최대 고민 중 하나다. 그리고 오늘 한 팀장 선배가 높으신 분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광복70주년 특별 전시회> 스팟을 재편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팀장, 국장, 본부장 같은 대단한 타이틀이 다 무슨 소용일까. 그들에게 과연 후배들에게 나눠줄만한 결정권이 있겠는가!

지금 KBS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후배 사이의 갈등에는 답이 없다. 나눠 먹을 게 있어야 협상도 하고 화해도 하는 법인데, 이 갈등에는 애초에 나눠 먹을 건더기가 없다. 그건 높으신 분 누군가 독점하고 계신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해피엔딩은 없다. ‘선배와 후배는 서로를 미워하며 오래오래 불행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것이다. 물론 같이 술 한 잔 먹으면 잠깐의 화해는 가능하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김연아랑 박근혜 대통령이랑 손잡고 애국가 부른다고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광복 70주년을 맞아 진행된 KBS '국민대합창' ⓒKBS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