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재의 詩詩한 이야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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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차단기 기둥 곁에서’,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옛사람들은 어떤 꿈을 신의 계시라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미래를 알려주거나 영혼의 메시지를 전하는 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꿈은 잠든 사람의 뇌가 만들어 내는 환상극장이다.

그 극장에선 꿈꾸는 사람의 간절한 소망들이 종종 상영된다. 그래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꿈’이란 단어가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소원을 뜻하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주장한 것도 간단히 말하면 ‘꿈은 소원성취이다’라는 명제다. 물론 그 소원성취는 단순하지 않다. 거기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개입하고,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온갖 욕망들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꿈에는 꿈꾸는 사람의 바람이 어떤 식으로든 녹아있다. 꿈을 소재로 한 시도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시에 묘사된 꿈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시인 혹은 화자가 바라는 것들과 만나게 된다. 독자의 소원이나 경험이 그것들과 겹쳐지면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서대경, <차단기 기둥 곁에서> 전문

ⓒpixabay

꿈이 꿈인 것은 꿈속에선 꿈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음을 ‘인간적’으로 알아채지만, 지금은 내가 염소이므로 ‘염소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염소적’이지 않다면 발굽을 보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깰 것이다. 나와 염소는 계속 잠을 이어가기로 타협한다. 이렇게 소원의 거래가 시작된다.

염소는 염소의 발굽, 뿔, 다리, 눈을 찬찬히 살핀다. 나는 염소가 틀림없군. 문득 엄마를 불러보지만 목소리는 엄마에게 가닿지 못한다. 내 목소리는 염소 목소리, 내 그림자는 염소 그림자. 이제 부드럽고 따스한 것은, 그러니까 염소가 욕망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풀이다. 엄마의 젖을 빨았던 입이 이제 풀을 탐닉하는 주둥이가 됐다.

염소는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에 빠져든다. 그때 기차가 지나간다. 염소는 자신이 매여 있는 차단기 기둥 둘레의 풀밭과 어릴 적 기억 속의 우리 집이 철길로 나뉘어 있음을 깨닫는다. 엄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인간적’인 소음의 하나일 뿐이다. 아마도 그만 놀고 저녁 먹으러 집에 오라는 말이겠지. 나는 철길 이편에서 풀을 뜯고 건너편의 엄마는 집으로 들어가 불을 켠다.

내 안에 있는 엄마의 자리, 오래전부터 비어있었던 그 자리, 언젠가 엄마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어왔던 그 자리는 이제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봉인된다.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는 나와 엄마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염소가 꿈속에서 이렇게 타협을 한다. 나는 염소로 살아가야 함을 인정하고, 염소는 나의 그리움을 용인한 것이다.

그렇지만 봉인은 언젠가는 풀리는 것, 더구나 그리움은 봉인으로 쓰기에 위험하다. 때로 그리움은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송재학의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는 꿈속에서 맡은 향기에 이끌려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만난 이야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전문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엄연함을 안다. 이미 저쪽으로 떠난 사람을 이쪽으로 불러오려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장소를 꿈꾼다. 그런 곳에서라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죽음과 삶이 뒤섞이는 그곳, 낮처럼 깨어서도 못가고, 밤처럼 잠들어도 못가는 그곳은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고, 붉은색과 흰색이 뒤섞이는 모호함의 공간이다. “결코 눈뜨지 말라” 저쪽은 그가 막고 이쪽은 내가 막는다. 나는 이곳이 꿈의 공간임을 안다. 그러나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깨어있을 때와 꼭 같다. 나는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그의 손길을 느낀다.

그런데 벌써 등불이 내걸린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숲의 나무들도 한 그루 한 그루 다 보이는데 벌써……. 어둠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나비 떼 가득 찬 이 옛날 숲은 사라져 버렸다. 깨어난 뒤 내 얼굴에 남은 그의 촉감은 실제보다 더 짜릿하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모두 부풀어 오른 뾰루지처럼 민감해져 있다.

그런데 등불은 왜 ‘미리’ 걸렸을까. 어쩌면 등불을 미리 내 건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댈 때 나는, 그를 보내려는 나와 그를 붙잡으려는 내가 뒤섞인 나였을 터이고, 그런 나이기에 이 모호함의 공간으로 초대받을 수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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