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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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방송 중인 프로그램이 말하는 '장수의 비결'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라는 말이 있다. 연인 사이에서 숙고해봐야 한다며 한때 SNS에서 유행한 명언이다. 이는 단순 남녀관계뿐만 아니라 프로그램과 시청자 사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채널을 틀었더니 나오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익숙하지만 갑자기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질 만큼 같은 시간, 같은 채널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온 프로그램들이 우리 곁에 있다.

실제로 각 방송사 편성부서는 매 개편마다 시청률 데이터 분석만 아니라 접수된 시청자 불만, 전문가의 평가까지 참고해 프로그램의 생사 여부를 철저하게 판단한다. 결국 10년 이상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들은 이처럼 ‘깐깐한’ 편성기준을 매 개편 시즌마다 문제없이 통과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꾸준히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비결①:방송사 아이덴티티에 부합

방송사를 대표하는 ‘간판 프로그램’은 대부분 방송사 이미지나 지향점과 맞닿아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KBS에서 롱런하는 프로그램들 중 정보 전달 프로그램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KBS의 가치를 담아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김윤환 KBS 편성정책팀장은 “KBS의 많은 교양 프로그램이 장수할 수 있는 건 시청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공익을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VJ특공대>, <아침마당> 등은 시청자에게 유익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KBS의 역할 중 하나인 공적책임 수행을 맡고 있기 때문에 오래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이하 <무엇이든>)는 1983년 정보 사각지대에 있는 시청자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당시 프로그램은 방송사에 전화기를 설치해 정보를 쉽게 얻지 못하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줬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정보를 구하기 쉬워졌지만 <무엇이든>의 역할은 퇴색되지 않았다, 알짜배기 정보를 걸러주는 큐레이션 역할로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는 실시간으로 시청자의 궁금증을 해결한다.ⓒKBS

<무엇이든>의 이태경 PD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시청자 곁에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만이 그동안 노력해온 결실에서 왔다고 분석했다. 30년 넘게 이어온 프로그램의 원칙은 단순 재미와 홍보와 광고로 얻을 수 있는 상업적 이익보다 ‘정확도와 신뢰도 높은 정보’를 시청자에게 생생하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무엇이든>은 매일 아침마다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를 이용해 시청자들과 좀 더 빠르고 가깝게 소통하며 바로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며 양질의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EBS<하나뿐인 지구> 역시 1991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EBS의 대표 장수 프로그램이다. 환경이라는 주제가 특집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단발성 아이템으로 다뤄지는 반면, <하나뿐인 지구>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늘 같은 자리에서 우리 주변의 환경 문제를 다루고 있는 환경 다큐멘터리다. 박찬모 EBS 편성기획팀 부장은 "<하나뿐인 지구>는 EBS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보여준다. EBS가 학교교육 보완뿐만 아니라 평생교육과 민주 시민교육을 지향하는 방송사인 만큼 EBS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계속 가지고 가야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 EBS<하나뿐인지구>는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도 주목한다.ⓒEBS

비결②:역사의 권위와 익숙함

시청자에게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 자체가 강점인 경우도 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늘 같은 시간, 같은 채널에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장수 프로그램은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높은 시청자 충성도를 나타낸다고 봐도 무방하다. SBS 편성팀 김규형 PD는 “늦은 밤 시간대 예능보다 오히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광고 판매 역시 안정된 수준을 보이고 있다”며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나 <궁금한 이야기 Y>와 같은 일부 오래된 교양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타 방송사의 9시 뉴스에도 대항할 만큼 충성도 높은 두터운 시청자층을 확보한 히든카드”라고 분석했다.

이미 고정된 시청 패턴과 습관을 깨기 힘들다는 이유도 한몫한다. 장수 프로그램이 요일이나 시간대를 바꾸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중파 방송 3사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다. KBS<영화가 좋다> SBS<접속 무비월드>는 각각 2005년, 2006년부터 MBC<출발 비디오 여행>은 1998년부터 현재까지 매 주마다 상영중 혹은 상영 예정작을 소개해오고 있다. 과거에는 마땅히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을 곳이 없어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문화생활 길잡이의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검색 한 번으로도 아직 크랭크인 하지 않은 작품의 줄거리와 등장인물까지 알 수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익숙함’에 있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영화 프로그램의 경우 KBS <가요무대>처럼 우리네 일상의 일부분이 된 지 오래다. 정보를 얻으려고 시청하기 보다는 향수를 느끼거나 습관적으로 트는 경우가 많다. 마치 없어도 불편하진 않지만 진짜 없어져 버리면 괜히 허전하고 서운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익숙함 때문이다. 프로그램 자체가 추억과 일상이 연결되는 지점인 셈”이라고 분석했다.

비결③: 프로그램의 색깔을 고수하는 뚝심

▲ 활기찬 아침을 여는 KBS <아침마당>은 올해로 25년 째다. ⓒKBS

10년 이상 쌓아온 브랜드 파워는 새로운 포맷이나 내용으로도 쉽게 대항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 버리기 쉬워도 구축하기 어려운 것이 프로그램의 ‘브랜드’라는 게 김윤환 팀장의 말이다. 매일 우후죽순 생겨나는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이름만 들어도 시청자가 떠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만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키워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이야기를 보고 싶을 때는 KBS <인간극장>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과 노하우가 쌓이고 쌓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오래 걸린다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한번 ‘잘 구축된’ 이미지는 곧 범접할 수 없는 브랜드 가치로 연결된다. KBS <아침마당>은 평일 아침 시간대 주부들의 수다가 열리는 장이고, 애동인(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사이에서 일요일 아침은 <동물농장>을 보고 바로 <서프라이즈>로 넘어가면 일요일 오전이 후딱 지나간다는 식의 ‘시청 공식’도 생겼다.

방송의 초심을 꿋꿋이 고수하므로 비슷한 장르나 내용의 최신 프로그램이 생겨도 불안하지 않다. 요즘 방송가를 점령한 쿡방, 먹방이 대중가요라면 EBS <최고의 요리비결>(이하 <최요비>)은 클래식 음악 같은 프로그램이다. 13년 동안 30-50대 여성들이 주 시청층인 만큼 전통적인 요리를 주로 다뤄왔다. ‘요섹남’ ‘쉐프의 요리 대결’ 등 최신 트렌드를 무조건적으로 좇기보다 요리 전문가에게 전통적인 레시피와 노하우를 전수받는다는 방송 스타일을 지킨다. 프로그램 색깔이 뚜렷한 덕분에 애청자 사이에서는 ‘없어져서는 안 될’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비결④: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

처음 방송 스타일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고 유연함을 보여준다는 점 또한 장수 프로그램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었다. 한 포맷으로 10년 동안 같은 주제를 다룬다는 일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청자와 시대의 흐름에 맞추려는 노력도 발 빠르게, 끊임없이 해야 한다. <최요비> 역시 지난해부터 ‘전통요리 노하우 전수’라는 기존 포맷은 유지하되 방송 시간을 10분 정도 늘려 포맷을 살짝 재편했다. 젊은 세대를 위해 상황, 주제별로 간단하고 편하게 해먹을 수 있는 쉬운 요리를 소개하는 코너를 따로 신설한 것이다. 반응은 뜨거웠다.

일요일 아침을 책임지는 MBC <서프라이즈> 역시 포맷과 구성, 진행 방식에 있어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초반 <서프라이즈>가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코너를 메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드라마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차용했다면 현재는 실증과 자료에 좀 더 가중치를 둔다. ‘진실 혹은 거짓’의 포맷에서는 진행자와 게스트가 필요했지만 과감히 이를 없애고 대신 이야기와 관련한 실제 증거와 자료화면, 역사적 고증을 삽입해 새로움을 꾀했다. “이는 예능과 드라마에서도 ‘리얼’에 방점을 두는 시대 흐름과 시청자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연출을 맡고 있는 김진호 PD가 말했다.

▲ SBS <동물농장>은 2001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SBS

SBS<동물농장>은 애동인(애완동물을 좋아하고 키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이 점점 많아지며 오히려 시청자 층이 더 넓어졌고 프로그램의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과거에 비해 동물을 인지하는 방식이 단순히 애완이었다면 지금은 인생을 함께하는 존재로서의 반려견까지 차원이 넓어지며 동물 전문 프로그램이 다룰 수 있는 내용의 외연 자체도 넓어졌다. 동물 역시 인격을 가지고 있고, 인간처럼 심리적, 정신적 치료를 통해 동물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것 역시 가능해졌다는 새로운 인식이 보편화되어가는 사회적 흐름도 한몫했다.

프로그램은 시대 흐름에 맞춰 다양한 포맷의 변화를 시도했다. 방송 초기에는 동물로 시트콤을 연출하거나 동물원에 살고 있는 특이한 동물을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지금은 동물학대를 고발하는 내용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룬다. 동물원에서 빈번하게 행해지는 동물학대 등 사회적 차원의 의제와 메시지도 던질 수 있게 됐다. 지난 해 12월 방영된 길고양이를 불법 포획해 고양이 탕을 끓여먹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물농장>의 백시원 PD는 “(프로그램 연출) 구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라며 동물 프로그램으로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을 (시청자에게) 다양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에필로그

▲ KBS <프로듀사> 12회 '장수 프로그램의 이해' 의 한 장면. ⓒKBS

지난 상반기 방송된 KBS<프로듀사>의 최종회 제목은 ‘장수 프로그램의 이해’였다. 제목보다 눈길이 가는 건 밑에 달린 부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위에 소개된 프로그램들이 롱런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몇 년을 방송 했는가’를 의식하지 않고 처음의 기획의도를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맞춰 효과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와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레 쌓이는 연차나 권위에만 기댔다면 절대 장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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