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근혜 대통령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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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군부독재 정권시절 쓰이던 ‘대통령 각하’라는 말을 ‘대통령님'이로 바꾼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김 전 대통령은 그런 상징적인 조치를 통해 권위주의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더 친근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시대를 거치면서 '각하'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군부독재 정권이 받아들였던 왕조시대의 문화는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지뢰 도발 사건 때 전역을 연기한 군장병들에게 감동을 받아 특별휴가와 특별간식을 선물한다며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은 장병들에게 격려 카드와 특별간식도 하사할 예정”이라고 보도자료를 냈다. ‘하사(下賜)’는 왕이 신하에게 금품을 내린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선물한다는 의미로 우스개로 쓰이기도 하지만 공식 용어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간식 하사'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은 장교를 제외한 장병 전원(약 56만 명) ‘1박2일'의 특별휴가증도 부여하기로 했다. 일부 언론은 이를 건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 폐하'를 모시는 왕조국가가 아니라면 따져볼 일이다. 대통령은 법과 절차에 따라 통치하는 행정부의 수반이다. 앞뒤 생각 없이 전군에 휴가를 내리면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규정된 휴가를 기준으로 장병의 운용 계획이 수립되는데 차질이 불가피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일 오후 대구경북과학기술원에서 열린 대구시민과의 오찬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

당장 박근혜 대통령의 ‘특별간식 하사'의 폐해가 국회에서 드러났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성준 의원은 대통령 특별 간식을 위해 '군 소음피해 배상금'으로 책정된 예산 중 12억원을 전용하기로 한 사실을 밝혀냈다. 국방부는 이를 불용 예산으로 예상되어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국민이 받아야 할 배상금을 전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지난달에도 있었다. 여름 바캉스를 유도한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8월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10일 전 쯤 발표한 것이었는데 혜택은 관공서 근무자들만 볼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통행료 면제라는 희대의 카드를 내밀었는데 전례가 없는 일로 이 또한 없는 예산을 전용해서 물의를 빚었다. 대통령의 '시혜의식'을 견제할 행정부의 견제 기능이 없다는 점이 큰 문제다. 

이렇게 대통령이‘아몰랑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언론은 칭찬으로 일관한다. 이런 행정이 얼마나 민폐가 되는지 지적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다들 대통령을 섬기는 것에만 열심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가서 비가 멈추면 멈추게 했다고 호들갑이고, 비가 오면 가물었는데 비를 오게 했다고 호들갑을 떤다. 요즘 대통령 관련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기사를 보면 '아부 오디션'을 보는 것 같다. 다들 아부할 구석을 찾지 못해 안달이다. 

언론이 아부를 하지 않고 비판을 하면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사례는 많다. 심지어 외신도 해당한다. 이런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대통령의 7시간'에 의문을 제기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은 '불령왜인(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일본에서 불령선인으로 부른데 빗댄 표현)' 취급을 받았다. 한국의 언론단체들이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신문의 언론자유를 주장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기도 했다.

▲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이런 기자들의 아부서비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도 이어진다. '마약사위' 이후 그에게 질문할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김대표 옆에서 침묵을 지켰다. 오직 독립언론 <뉴스타파> 기자만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캐물을 뿐이었다. 요즘 기자들은 취재를 하지 않고 취재원 심기관리에만 열심이다. 

이 정도 시절이면 '박근혜 대통령 폐하'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대통령을 섬기는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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