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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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김진혁 한예종 교수

최근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고영주 이사장의 ‘공산주의자’ 발언과 관련한 논란을 보며 새삼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 누구일까 생각하게 됐다. 정확히 말해 고영주 이사장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가 고영주 이사장을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문재인 대표의 표현에 대해 분석해 보고 싶은 욕망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사실 ‘민주주의의 적’이란 표현은 그동안 민주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반민주 세력’과 비슷한 의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존의 표현을 서술형으로 풀고 거기에 ‘내부의’라는 표현을 삽입한 것 정도다. 하지만 ‘반민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 뉘앙스는 차이가 크다. 그리고 그 뉘앙스의 차이 속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우선 ‘반민주’에서 ‘반’이라는 표현과 ‘민주주의 내부의 적’에서 ‘적’이라는 표현은 표현의 수위가 다르다. 전자가 막연한 느낌이라면 후자는 매우 구체적이다. 너무 구체적이어서 약간의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인데, 마치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지목하며 ‘저 사람이 바로 적이다!’라고 외치는 이미지까지 연상된다.

▲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문화진흥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감사 재개를 기다리고 있다. ⓒ뉴스1

그처럼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영주 이사장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다르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반대 세력’은 넓게 보면 논쟁과 설득의 대상이지만 ‘적’은 공격과 제압의 대상이다. ‘반대’는 사회 안에서 포용할 수 있지만, 적은 사회 안에 그냥 둬선 안 되는 대상이다. 따라서 ‘적’이라는 표현에 동의하게 되면 고영주 이사장을 향한 태도는 이렇게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적’을 그냥 둘 경우 적은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려 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는 그러한 적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논리일 것이다. 맞다. 고영주 이사장 같은 매카시스트들이 사용한 방식을 그대로 뒤집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내부의’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반민주 세력’이라고 하면 민주주의 세력과 대치하는 집단의 이미지가 연상 되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가 아직도 민주주의 사회로 정착하지 못하고 민주와 반민주가 대치를 하는 혼란스러운 사회로 느껴진다. 즉 민주주의가 아직까지도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충분한 동의를 받지 못한 가치임을 은연중에 인정한다. 하지만 ‘내부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반민주는 민주라는 전체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즉 이미 사회 구성원 다수에 의해 ‘민주주의 사회’로 확실하게 동의를 받았으며 반민주 세력은 그저 ‘내부의 극소수’에 불과한 셈이다. 이 역시도 고영주 이사장같은 매카시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간첩’의 뉘앙스를 그대로 뒤집어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민주 세력’은 열등한 말이고 ‘민주주의 내부의 적’은 우월한 혹은 세련된 표현일까? 꼭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어떠한 말의 의미가 그 말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사회 현실을 적확하게 반영하느냐의 여부에 있다고 보면, ‘반민주 세력’이란 말이 등장한 군사독재 시절엔 충분히 훌륭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우선 당시엔 민주와 반민주가 실제로 대치하고 있었고, 물리적인 힘에서 민주세력이 열세라고 하면 오히려 1대1의 대결구도를 의미하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표현은 민주세력에게 유용하지 않았을까?

▲ 김진혁 한예종 교수

그렇게 보면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란 표현은 시대에 맞춰 업데이트 된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군사독재 시절의 낡은 용어들이 수구보수세력보다 오히려 민주진보진영에도 많이 남아 있는 요즈음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란 표현이 눈에 띄는 이유다. 물론 그 방식이 꼭 상대방의 방식을 뒤집어 사용하는 것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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