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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설이라 하지 못하던 시절도 ...

|contsmark0|설을 설이라 말하지 못하고 ‘민속의 날’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5공시절 이야기다. 하지만, 이른바 이중과세(二重過歲)를 하루 바삐 없애야 할 후진적인 풍습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오래 전인 3공화국부터였다. 휴일을 하루라도 줄이는 만큼 일을 더 시켜서 수출물량을 채워야 하는 한국적 경제개발정책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잘 나가는 이웃나라에서도 구정이 아닌 신정을 지낸다 하니 우리나라에서 구정을 없앤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음직 하다.정부가 나서서 사회관습이나 문화를 뜯어고치려 한다거나 국민을 가르치고 세뇌시키려 드는 버릇은 아마도 일제시대에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정부가 자상하게도 민족의 명절풍습조차 뜯어 고치겠다고 나섰으니, 권력의 나팔수였던 당시의 신문과 방송이 충실하게 따른 것은 물론이다(나도 그때 애숭이 pd였다). 당시의 문공부에서는 언론이 ‘설’ 또는 ‘구정’이란 말조차 아예 쓰지 못하게 했고, 그래서 방송사에서는 ‘설날특집’이 아니라 ‘민속의 날’ 특집을 꾸며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 특집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설날풍습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민속의 날’답게 이를테면 풍물패가 판굿을 벌이는 장면 따위를 연출해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헌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설날은 조용히 성묘하고 세배하는 날이 아닌가! 여기저기 세배 다니며 설을 하루이틀 지난 뒤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전통놀이가 시작돼 그것이 정월대보름까지 계속 되는 것이다. 풍물패가 액살(厄煞)을 막고 명복(命福)을 불러들이는 뜻에서 마을 당산부터 시작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 밖에 줄다리기, 달집태우기, 놋다리밟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따위의 각종 전통의례 또는 놀이도 거의 모두 정월대보름날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굳이 민속의 날이라는 것을 만들려면 설날이 아니라 보름날을 택했어야 옳다.하지만, 아무리 정부의 정책이 그렇고 언론이 충실하게 따랐어도 사람들은 전통을 쉽사리 버리지 않았다. 신정 공휴일을 3일로 늘이고 설날을 하루만 놀게 했어도, 신정에 차례를 지내는 집안은 공무원이나 그 비슷한 사정이 있는 집을 빼면 얼마 되지 않았다. 양력 1월 1일이 되면 으레 신문 방송에서 모모년의 새해가 밝았으니 무슨 띠가 어쩌구 그 동물이 저쩌구 하는 무식한 소리를 해도(이것은 지금의 언론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뜨지 않은 정축(丁丑)년 소띠 해가 언론에서는 이미 한달하고도 6일이 지난 셈이다), 사람들은 결코 새로 태어나는 자기 아이의 띠를 혼동하지는 않았다. 산줄기에 쇠말뚝을 박는 저 지독한 일본제국주의도 결코 완전히 없애지 못한 우리의 끈질긴 전통문화인 것이다.이토록 당연한 것도 한때는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버렸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과거의 경험을 오늘과 미래에 그대로 적용해 보는 것이다. 20년이나 30년 뒤에는 오늘날의 또 어떤 것들이,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던 한심한 일들로 판명될 것인가? 국회에서 일어난 새벽의 악법 날치기라든가 나라를 흔드는 재벌과 권력의 어마어마한 돈장난 따위가 아마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도 1997년의 한국에서 일어났던 어처구니 없는 사례로 기록될 터이다. 사람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권리가 당연히 돈버는 일보다 앞서야 하는 것임에도, 1990년대의 한국에서는 환경오염이 마치 남의 일처럼 내팽개쳐져 있었다는 기록도 보고서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그리고, 또 지금의 무엇무엇이, 후대에 작성될 ‘그 한심했던 옛날 일들’의 목록에 들어갈 것인가? 혹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 목록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인가? 세기말을 힘겹게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식자층’으로서의 우리들 일이 말이다.|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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