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설정을 버무려 ‘관계’를 파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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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따져보기] SBS '애인 있어요'

“너무 늦었다는 거 아는데 한 번만 기회를 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최진언(지진희 분)은 의문의 남자에게 피습을 당한 독고용기(김현주 분)가 수술 후에도 쉽사리 의식을 찾지 못하자 애원한다. 그는 또 독고용기가 자신의 전처 ‘도해강’이라는 확신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나자 오열한다. 강설리(박한별 분)에게 흔들렸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해강과의 사랑을 복기했다. 한 때 부부, 그러나 산산조각 난 진언과 해강의 이야기, SBS 주말특별기획 <애인 있어요>는 50부작 중 절반의 반환점을 앞둔 가운데 변곡점을 맞이했다.

<애인 있어요>는 “기억을 잃은 여자, 죽도록 증오했던 남편과 사랑에 빠진다, 아니 불륜한다”라는 기획의도만 보면, 뻔한 불륜 혹은 줌마렐라 스토리가 이어질 거라는 예상할 만했다. 특히 이 작품에는 한국 드라마들이 자주 차용하는 상투적 설정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출생의 비밀(도해강-독고용기), 재벌가의 등장(천년제약), 불륜 코드(최진언-강설리), 삼각관계(최진언-도해강-백석), 그리고 인물들 간 우연과 필연이 반복된다. ‘안 봐도 비디오’라는 표현처럼 <애인 있어요>에는 이른바 대중에게 ‘먹히는’ 설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SBS '애인 있어요' ⓒSBS

그렇다고 해서 <애인 있어요>를 상투성을 앞세운 ‘불륜 드라마’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언가 있다. 드라마는 진언과 해강의 관계를 주축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들에게 서로만을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지만 딸의 죽음으로 둘의 사이는 삐걱거린다. 겉으로 봤을 때 소원해진 부부 관계에 불륜이라는 불씨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방송분이 절반가량 남은 상황에서 진언은 이미 독고용기가 자신의 전처, 도해강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고 예전의 사랑을 복원하려는 의지가 다분하다. 기억을 잃고 독고용기로 살았던 해강도 기억을 되찾으면서 백석(이규한 분)이 아닌 진언에게 쏠리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이처럼 진언과 해강은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관계의 끝에서 시작을 만들어내고 있는 <애인 있어요>는 배유미 작가의 화두를 보여주는 듯하다. 배 작가는 드라마의 단골 소재를 끌어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인물 간 갈등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천착하는 데 능숙하다. <반짝 반짝 빛나는>(MBC)은 부잣집과 가난한 집의 딸이 출생과 동시에 뒤바뀐 ‘운명의 장난’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부의 축적과 관계없이 흔들리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었다.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MBC)에서는 좀 더 파격적인 설정을 가미했다. 하은중(김재원 분)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유괴범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관계를 흔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설정을 심어두면서 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방식이다.

이 밖에도 가족, 부부, 연인 등 완전무결한 사랑이 요구되는 관계에 대해선 사회적 통념을 뒤엎으며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았다. 예컨대 2004년에 방영된 <12월의 열대야>(MBC)는 이례적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의 외도를 다뤄 화제가 됐다. 10년간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순응해온 오영심(엄정화 분)의 외도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요구받는 전통적 여성상을 비추는 동시에 부부 간의 권력 관계를 보여줬다. 이처럼 배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계를 탐닉하는 실험을 다양하게 시도해왔다. 관계의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작품 속 인물 간 관계를 비튼 뒤 제자리에 돌려놓기도 하고, 사회적 통념을 흔들었던 것이다.

<애인 있어요>도 연장선상에 있다. 이 작품은 진언이 불륜을 저지르는 행위보다 불륜을 저지른 이후 이들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해강을 배신했던 진언은 해강을 잊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배신의 기억을 잃었던 해강도 기억을 되찾으며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어긋났던 이들이 불륜, 기억상실, 우여곡절의 사건 등 드라마의 진부한 설정들을 거치며 다시 만나버린 것이다. 얼마 전 시청률 고전으로 조기 종영설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시청자 마니아층 사이에선 지금부터가 <애인 있어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 같다며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배유미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단지 운명론적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아마 드라마가 일찍 막을 내리지 않는다면, 배 작가는 다시 만난 진언과 해강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숨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보여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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