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광화문의 니콜라이
상태바
지워진 광화문의 니콜라이
[권성민의 끼적끼적]
  • 권성민 전 MBC PD
  • 승인 2015.11.27 0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두 장의 사진이 있다. 굳이 위의 원본을 함께 놓고 비교하지 않는다 해도, 아래 사진은 확실히 이상하다. 보통 인물 사진을 저런 이상한 여백을 두고 찍지는 않는다. 게다가 주인공은 스탈린이지 않은가. 저 철권 통치자의 사진을 정면에서 찍는 업무를 수행하는 사진사로서는, 이런 과감한 구도를 시도하기엔 부담이 너무 크다. 두 장을 함께 놓고 보면 더없이 명확하지만, 아래의 수정된 사진만 놓고 봐도 이건 무언가를 지운 사진이다.

지워진 인물의 이름은 니콜라이 레조프, 소비에트 연방 당시 KGB의 전신인 비밀경찰 NKVD의 수장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들고 앞장서서 대대적인 숙청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저 위의 지워지기 전 단단하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은 그가 이렇게 권력의 칼자루로 활약하던 1930년대의 것이다. 지워진 사진은 1940년대의 것. 그는 짧은 권력을 누리고 1939년에 총살당한다. 딱히 체제를 배반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강력한 충성을 바쳤고, 그 충성의 대가로 받은 권력이 체제에게 부담을 느끼게 할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수많은 이들을 숙청했던 딱 그 방식대로 최후를 맞는다. 그가 충성을 바친 시스템의 논리대로 말이다.

▲ (위)작자미상, 이오시프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레조프, 1930년대.(아래) 이오시프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모스크바, 수정한 사진, 1940년대.

그리고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 <1984>에서 그랬던 것처럼, 니콜라이는 모든 기록에서 ‘없었던 사람’이 된다. 스탈린은 니콜라이가 등장했던 사진들을 없애는 대신, 사진 속에서 니콜라이만 골라서 지워버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체제의 부담이 될 정도의 권력을 누리던 이였다. 사진 속 니콜라이가 지워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모든 사람이 기억한다. 스탈린은 자신의 ‘조작’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저 사진의 어색한 공백에서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뻔뻔함이 느껴진다. 지워진 니콜라이, 그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이 체제 안에서는 누구든지 이렇게 될 수 있다. 니콜라이는 지워짐으로써 더 강력한 흔적을 남긴다.

조금 다른 얘기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노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때마다 맥락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은 지난 14일 광화문에서 벌어졌던 시위의 한 장면이다. 눈에 최루액이 들어가 괴로워하고 있는 의경에게 물을 뿌려주고 있는 시위참여자의 사진. 양쪽의 폭력성에만 모든 여론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이 사진은 하나의 미담이 되어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확산되었다.

▲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당일 한 시민이 최루액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의경의 눈에 물을 뿌려주고 있다. ⓒ트위터 캡쳐

그런데 얼마 뒤 어느 종편 뉴스에서 전의경 부모와의 전화 인터뷰 화면에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 사진을 삽입했고, 그 즉시 시위참여자들을 비난하고 싶어 하는 네티즌들은 이 장면을 더욱 교묘히 잘라내어 사실은 시위참여자가 아니라 해당 의경의 어머니였다는 내용의 글을 앞 다투어 퍼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사진의 주인공이 등장해 사실 왜곡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그의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자마자 이들은 다시 그가 ‘알바노조’ 소속이라는 개인정보를 찾아내어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담의 주인공이 순식간에 ‘불순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포토저널리즘이라는 단어는 사진의 역사만큼이나 지난한 말이 되었다. 이전의 미술과는 달리 창작이 아닌 ‘기록’이라는 점 때문에 그 현장성에 주목했다가, 결국 사진도 맥락이 제거된 하나의 ‘선택된 순간’이라는 특성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위험성에 대한 주의가 끊임없이 요구되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역사 동안 이 저널리즘의 윤리는 그리 나아진 점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던 초창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진 사진의 양 속에서 저널리즘 윤리의 농도는 더욱 희석된 걸로 보인다. 보란 듯이 니콜라이를 지워놓은 스탈린의 뻔뻔함과, 어떻게 읽힐지 뻔히 알면서도 시위참여자의 사진을 전의경 부모 인터뷰의 배경으로 깔아놓은 종편 채널의 뻔뻔함 중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운가. 새롭게 조작된 그 맥락이 조금이라도 희석될까봐 오해가 더 강해지도록 방송 화면을 잘라내어 뿌린 네티즌들에 이르면 스탈린의 그 뻔뻔함이 오히려 우직해보일 지경이다.

14일 광화문에서 벌어진 집회를 다룬 뉴스들은 하나 같이 시위참여자들과 경찰의 물리적인 충돌에만 관심을 보인다. 십만 명이 모인 집회였다. 경찰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불법폭력 시위자’의 숫자는 594명.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불법폭력’에 대한 경찰의 기준을 그대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1%가 채 되지 않는 비율이다. 십만 명이 왜 모였는지, 무슨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어서 추운 겨울 길 위로 나섰는지를 관심 있게 다루는 주류 언론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1%도 안 되는 이들의 처절한 몸싸움에만 카메라를 들이댔을 뿐. 니콜라이가 지워진 사진은, 균형이 맞지 않는 구도 속에서 웃으며 걷고 있는 스탈린의 모습보다, 그 어색하게 빈자리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보도되지 않은 십만 명의 목소리가, 마치 어색하게 지워진 니콜라이의 빈자리를 보는 것 같다. 권력이 언론을 다루는 방식, 언론이 권력에 기생하는 방식은 지긋지긋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참고: 다니엘 자라르댕, 크리스티앙 피르케르,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정진국 옮김, 미메시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