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로컬리티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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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로컬리티란 이런 것이다!
[김욱한의 촌방촌설 村放寸說] KBS광주 ‘남도 지오그래피’
  • 김욱한 포항MBC PD
  • 승인 2015.12.0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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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광주 '남도 지오그래피' 타이틀 ⓒKBS광주

이번 글은 뜻하지 않게 많은 영어 단어를 넘나들게 될 것 같다. 첫 번째 키워드가 ‘지오그래피geography’이다. KBS 광주총국이 제작하는 인간미 넘쳐나는 구수한 지역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남도 지오그래피’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외국어 실력이지만 부득이하게 많은 영어 단어들을 이 글에서 계속 언급하게 됨을 미리 양해 구한다.)

지리학으로 통칭되어 번역되는 ‘지오그래피’가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일 것이다. 1888년에 미국 국립지리학회가 창간한 잡지로 시작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은 1997년 영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채널로 확장되어 자연다큐멘터리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지금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사견을 전제로 나는 지리학이라는 학문의 태동이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저변에서 발원되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서구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동양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등등의 제 3세계는 그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오래 전부터 그 곳에서 살며 독창적인 문명을 이루어왔던 사람들은 인디오, 황인종 혹은 토착부족 등의 개념으로 타자화 하면서 백인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서구의 백인들이 새로운 땅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개척지(혹은 식민지)들은 역사가 시작되고 신과 문명이 깃들었다고 그들은 여긴 것이다. 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개념 설정인가. 그야말로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을 타자화 시키는 배척의 정신이 지리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또한 지리학은 국가적 장려 혹은 지원을 받으면서 겉으로는 ‘발견’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점령과 지배를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킨 제국주의의 과학적 근거로 기여하기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금도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등의 채널에서 방송되는 다큐의 상당 부분은 비서구권을 야생과 혼돈 그리고 기이함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편협한 방송이 판치는 채널인 것이다.

▲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보자면 KBS광주 <남도 지오그래피>는 완벽하게 타이틀에 부합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KBS광주

무척 아이러니한 작명이다. 가장 지역적이고 가장 토속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역방송의 타이틀에 ‘지오그래피’라는 단어를 각인시킨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한참 고민해 봤다. 아마도 지역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의 정신을 담보하기 위한 리얼리티에 대한 고민이 ‘지오그래피’라는 단어의 영역까지 제작진을 몰고 간 이유였을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보자면 <남도 지오그래피>는 완벽하게 타이틀에 부합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나만의 표현으로 얘기하자면 “진짜배기가 왔다!”고 말하고 싶다. 포장도 선택도 기교도 거의 없다. 그냥 모월 모일 모시에 우연히 만난 동네 어느 어르신의 일상을 그냥 뚝 떼어내서 프로그램에 툭 던져 놓은 것 같은 진짜 방송이 <남도 지오그래피>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진짜 방송에 나는 살짝 감전된 기분이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이 프로그램 속으로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발견’을 위한 탐사를 떠나 볼까 한다.

2008년 전파를 타기 시작한 <남도 지오그래피>는 KBS 광주총국의 큰 기둥으로 8년을 이어오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남도사람과 땅에 스며있는 숨결을 그려내고 남도의 문화지형을 다시 그리고자’하는 기획의도로 발을 내딛은 이 프로그램은 여러 방면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먼저 촬영과 편집의 영역에서 여타의 프로그램들과 차별화되는 스타일이 감지된다. 이른바 로컬리티의 극대화이다.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 ‘하이퍼로컬리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마땅히 번역된 말이 없어서 극지역주의 혹은 초지역주의 쯤으로 혼자서 해석해 볼 뿐이다. 지역성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하이퍼’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단위 혹은 소규모 공동체 단위의 관심사까지도 지역 언론이 다루고 알리는 경향을 이르는 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남도 지오그래피>는 그야말로 ‘하이퍼로컬리즘’의 성공적인 교과서라고 평가 받을 만하다. 이런 경지는 그저 우연히 이룬 것이 아니라 기획 초기의 정확한 목표 설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정현동 PD의 꾸밈없는 묘사가 바로 그 예이다.
“시작은 ‘로컬리티’였습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동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용산댁네 팔순잔치’ ‘우리 동네 마을버스가 처음 들어오는 날’ 그리고 누구누구 집 백일잔치까지... 방법은 ‘좁고 깊고 그리고 느리게’였습니다. 눈만 밝다면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 2008년 전파를 타기 시작한 <남도 지오그래피>는 KBS 광주총국의 큰 기둥으로 8년을 이어오고 있다. KBS광주 '남도 지오그래피' ⓒKBS광주

‘하이퍼로컬리즘’이 가고자하는 그 길이 위의 말에 가장 쉽게 설명되어 있다. 규모의 경제보다 지역방송이 살 길이 어쩌면 바로 이 ‘하이퍼로컬리즘’일 수도 있다는 많은 언론학자들의 고민을 정현동PD는 경험에서 미리 깨우친 것일지도 모른다.

하이퍼로컬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의 섭외와 촬영이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아이템’의 개념이 먼저 전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게 아이템이 될까 하고 자문한다. 그 ‘아이템’이라는 말 속에는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알리고 보여줄 만한 거창하고 독특한 그 무엇’에 목말라하는 매너리즘에 근거한 판단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관습적 판단 기준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사소한 소재도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용기가 하이퍼로컬리즘을 이루기 위한 전제가 된다. <남도지오그래피>가 아이템을 대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특별한 사람을 찾지도 않고 특별한 섭외를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 모으거나 웃음을 강요하는 연출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방랑 김삿갓처럼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다가 만나는 장삼이사 동네 주민들이 그날의 주인공이 되고 그날의 이벤트가 될 뿐이다. 가히 무위로 아이템을 창조하는 반열에 올랐다고 표현할 만하다.

로컬리티의 극한을 향해 다가가는 제작 방식은 아울러서 리얼리티의 극한까지 덤으로 되돌려 받는 뜻하지 않은 수확을 올리기도 한다. <남도 지오그래피>는 VJ 4명이 촬영을 전담한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촬영의 자연스러움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미덕이다. 초창기 다큐 영화 역사에서 리얼리티 논쟁이 뜨거웠을 때 ‘시네마베리테’와 ‘다이렉트시네마’가 경쟁하며 큰 흐름을 양분한 적이 있다. <남도 지오그래피>는 ‘다이렉트시네마’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촬영 과정에서 연출과 개입을 배제하고 철저히 관찰과 팔로우를 지켜나가는 노력이 바로 그 것이다.

▲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사소한 소재도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용기가 하이퍼로컬리즘을 이루기 위한 전제가 된다. KBS광주 '남도 지오그래피' ⓒKBS광주

이런 노력으로 건져 올린 화면과 인터뷰는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풍성한 입담을 시청자들에게 선사한다. 시종일관 화면 가득 퍼지는 이런 따스함과 친근함으로 미루어 보건데, 촬영에 쏟은 VJ들의 땀과 정성이 녹록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현동 PD의 말을 빌려 그들의 애환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어느 VJ가 술자리에서 넋두리처럼 얘기했습니다. ‘우린 남도해서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할라고 돈 번다!’ 어느 VJ는 <우리동네 마실돌기>를 찍는데 마땅한 아이템을 못 찾아 한주에 34개 마을을 돈 적도 있습니다. 그게 VJ들의 노하우라면 노하우입니다. 모든 아이템을 발로 찾습니다. 무대뽀 정신으로.”

<남도 지오그래피>는 편성 시간에 있어서도 파격을 이어가고 있다. 매주 4회(월~목) 저녁에 20분씩 방송이 된다. 짧은 분량의 다큐 프로그램이 주간 단위로 편성이 되는 사례는 없지 않아 드물게 있지만 주 4회 편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일일 단막극 편성처럼 안방을 찾고 있는 것이다. 네 개의 코너를 연속극처럼 띠편성을 한 시도는 신선함 그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8년째 이어온 이 프로그램은 최고 시청률 15%를 찍기도 하고 얼마 전까지 평균 시청률 8%대를 유지해온 지역의 인기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부터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코너와 시청 연령대가 시골 마을의 어르신들로 모아지면서 오늘의 <남도 지오그래피>가 있게 됐다. 정현동 PD가 돌아본 8년의 짧은 소회를 소개한다.
"그동안 많은 PD들이 프로그램을 거쳐 갔습니다. 각자의 선호도에 따라 아이템도 조금씩 달라졌죠. 그러면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거기에 따라 프로그램은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갔고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기획 의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희화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로컬리티와 리얼리티를 높여주는 <남도 지오그래피>의 또 하나의 장치는 내레이션 성우의 사투리에 있다. 지역 출신의 연극인이 구사하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는 현장 인터뷰와 경계를 허물면서 해설인 듯 인터뷰인 듯 구분이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섞여 들어간다. 바로 옆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하듯 읊조리는 해설은 언뜻 판소리 현장에서 고수의 추임새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거창한 해설은 아예 없고 가르치고 설명하는 이야기도 없다. 그저 화면속의 노인들에게 말을 건네 듯 이야기하고, 또 같이 아파해주 듯 탄식하면서 녹아들고 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전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내레이션이지만 지역 어르신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귀에 속속 들어오는 친절한 해설이 될 터이다. 이게 바로 하이퍼로컬리즘의 진수가 아니겠는가?

그리스어 ‘지오그라피’에서 출발한 지리학은 칸트 이후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지만,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한반도의 남도인 광주 빛고을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지역과 사회와 인문이 합쳐지는 그런 사람 냄새나는 상생의 지리학이 여기 <남도 지오그래피>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가고자 길과 가 닿고자 하는 목표는 어디일까. 정현동PD의 소박한 꿈을 전한다.
“할머니들이라는 통칭에서 벗어나 용산댁, 동월댁, 죽림댁 같은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분들의 농투산이(농부의 방언)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말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신들 덕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고 그걸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남도 지오그래피>의 꿈이 지역방송 모두가 꾸는 희망의 꿈이 될 터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김욱한 PD의 촌방촌설 다른 글 보기]

*필자 김욱한 PD는 포항MBC 편성제작센터장이면서 PD연합회 대구경북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술과 썸타면서 방송과 연애하고 있고 책과 밀당 중이다. '변방에서 낮게 나는 부엉이'라는 황당한 닉네임을 스스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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