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입체 음향 방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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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없는 라디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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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미로 대표되는 이른바 ‘대륙의 실수’들, 괜찮은 성능과 놀랄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무장한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제는 ‘대륙의 실력’이라는 말도 낯설지가 않습니다. 더 이상 중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런데 라디오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 중국 광저우와 안휘에서는 5.1채널 입체 음향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디지털 라디오라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겠지만, 놀라운 것은 이것이 FM 방송에서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광저우 라디오 GZBN FM 102.7에서는 <HD 뮤직타임>을, GZBN FM 96.2와 안휘 라디오(Anhui FM) 98.0에서는 <AV 스페이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일주일에 2시간 내지 4시간을 5.1채널 입체 음향으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주요 콘텐츠는 클래식 음악, 드라마, 공연 실황 등이며 가끔 다자간 토론이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기도 합니다. 아직은 라디오에 적합한 입체 음향 콘텐츠가 많이 확보되지 않았고 새롭게 제작하는 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기 때문에 방송 시간이 제한되지만, 한 번 입체 음향 프로그램을 들어본 청취자는 확연한 차이에 감탄하며 매주 찾아오는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물론 일반 라디오 수신기가 갑자기 입체 음향 재생기기로 변모하는 것은 아닙니다. 5.1채널 입체 음향으로 제작된 콘텐츠를 DTS Neural Surround™ technology(뉴럴 서라운드 테크날로지)가 적용된 2채널 스테레오 신호로 변환해 송출하면 그에 맞는 디코더가 내장된 수신기를 통해 5.1채널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FM 주파수로 송출되는 스테레오 신호에 5.1채널 정보를 실어 보내고 그 신호를 해독할 수 있는 기기에서는 입체 음향으로 재생이 되는 것입니다. 홈씨어터를 갖춘 가정이나 음악카페에서 들을 수 있지만, 대다수는 자동차에서 감상한다고 합니다. 해당 디코더가 없는 기존의 라디오에서도 평소 듣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상적인 청취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방송국도 청취자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청취자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오히려 일반 방송보다 소리가 더 풍부하게 들린다는 응답도 많았다고 합니다.)

▲ 뉴럴 서라운드 방송 개념도.

여기에 적용되는 ‘뉴럴 서라운드’라는 기술은 이미 오래 전에 미국 HD 라디오에서 스포츠 중계 방송 등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5.1채널 입체 음향 콘텐츠를 스테레오 신호로 바꿔서 송출하는 장비의 가격도 생각보다 굉장히 저렴합니다. (영업상 비밀이지만, GZBN이 DTS에 지불한 비용은 현지 PD 한 사람 월급 정도밖에 안됩니다.) 송출된 스테레오 신호를 해독해 5.1채널로 다시 바꿔주는 수신기도 특별히 고가의 장비가 아닙니다. 심지어 최근 출시되는 카오디오들은 펌웨어 업그레이드만 해주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손쉽게 라디오 방송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디지털 라디오 도입이 지연되고 있는 한국에서는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중국은 하고 우리는 못하고 있을까요?

사실 한국에도 몇 년 전에 이 기술이 소개됐고, CBS 기술연구소와 같은 곳에서는 도입을 염두에 두고 상당한 정도까지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방송사 입장에서는 수신기가 전혀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입체 음향 방송을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수신기 제조사들, 대표적으로 현대 모비스와 같은 카오디오 제작 업체들 입장에서는 입체 음향 방송이 전무한데 무작정 디코더를 장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술을 제공하는 업체와 방송사, 수신기 제조사가 여러 차례 만나서 논의를 했지만 어느 쪽에서도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먼저 투자하려 하지 않아서 몇 년째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도 시장 상황은 같았습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남다른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BYD라는 자동차 제조사가 자사의 중급 이상 모델에 뉴럴 디코더를 장착하면서 동시에 방송사의 콘텐츠 제작을 일정 부분 지원하고 나선 것입니다. 1995년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로 출발한 BYD는 워렌 버핏이 대규모 투자를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 설립 20년만에 노트북, 휴대폰과 자동차의 거의 모든 부품(유리와 타이어 외의 모든 부품을 만든다고 자랑합니다)을 자체 생산하는 완성차 제조업체로 성장해버린 괴물같은 기업입니다. 특히 한 번 충전으로 최대 480km를 가고 시속 180km까지 달릴 수 있는 전기자동차(E6, 양산형 스펙과는 다른 내용입니다)를 만들어내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 중국의 BYD라는 자동차 제조사는 자사의 중급 이상 모델에 뉴럴 디코더를 장착하면서 동시에 방송사의 콘텐츠 제작을 일정 부분 지원하고 나섰다. 사진은 BYD의 e6 모델.

이 회사는 자동차 후발주자로서 승차감이나 출력, 연비 등으로 눈에 띄는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운전자의 UX, 사용자 경험을 높이는 쪽에 초점을 맞추기로 합니다. 그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차별화된 오디오를 장착하기로 했고 DTS Neural Surround™ technology를 과감히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전략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실제로 이 회사의 차량을 구입한 사람의 대다수가 자기 차의 주요한 장점으로 입체 음향 라디오를 거론하고 있으며, 다음에도 이 기능이 있는 차량을 구입하겠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방송사, 청취자, 제조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디지털 라디오를 도입하지 못한 한국에서 청취자들이 바라보는 라디오는 FM과 스테레오 이후로 기술발전이 멈춰 있습니다. 유럽, 북미와 달리 한국에서 라디오는 올드 미디어라는 인식이 특히 지배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넓혀 보면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라디오 방송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광저우 라디오가 도입한 Neural Surround 방식 뿐 아니라, 헤드폰(이어폰)을 통해 가상 입체 음향을 체험할 수 있는 DTS Headphone:X, Fraunhofer Cingo와 같은 기술도 FM 방송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CBS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와 최근 방송된 <소리로 보는 영화> 12부작에서 이 기술들을 적용한 바 있습니다.)

기술이든 콘텐츠든, 세계의 라디오는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멈춰 있는 것은 우리 라디오 업계 구성원들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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