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방송장르 결산] |
2015년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위기’이다. 시사 장르는 위기에 처했고, 교양 장르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의 간판 탐사 보도 프로그램들은 한 때 성역과 금기 없는 보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유명무실해졌다. 이어 방송사들이 공론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대중의 언론 불신도 깊어졌다. 교양 장르는 다매채 다채널 시대에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가볍고 재미있는 콘텐츠 소비 흐름으로 ‘시사의 예능화’에 이은 ‘교양의 예능화’ 바람이 불었다.
[시사 ①] 민감한 이슈 외면하는 언론, 탐사 보도의 실종
올해 한국 사회는 여전히 들끓었다. 하지만 언론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탐사 보도 프로그램의 역할은 왜곡된 현실을 들춰 개선안을 제공하는 데 있지만 그 역할이 많이 축소됐다. 국내 대표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MBC <PD수첩>은 올해 ‘아동 폭행’, ‘성추행’, ‘여성혐오’, ‘노인빈곤’, ‘데이트 폭력’을, KBS <추적 60분>은 ‘자영업자 실태’, ‘분노 범죄’등을 다뤘다.
이를 두고 소재주의와 연성화된 아이템에 매몰돼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노동 개혁’ 등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현안들을 다각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지금의 시사보도나 탐사 프로그램은 민감한 정치사회적 현안 같은 중요한 아이템은 다루지 못한 채 소재주의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방송의 공정성을 확보할 보루를 지켜내는 것조차 힘겨워진 현실”이라는 날선 평가를 내놓았다.(<방송작가> 12월호)
방송사의 사정도 있었다. MBC는 지난해 “2015년에도 획기적인 아이템을 발굴하고, 적극적인 탐사보도를 추진해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의 저력을 발휘할 것”(MBC 공식 블로그 중/송재우 시사제작국장)이라는 포부와 달리 안팎의 비난 여론을 무릅쓰고 ‘시사교양국 해체’ 수순을 밟았다. KBS는 탐사보도팀이 친일파를 다룬 <훈장>을 석연치 않은 이유를 내세워 방송을 연기했다. 이렇듯 방송사의 내부 사정으로 탐사 보도의 영역이 더욱 좁아졌다.
‘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감시견’이라는 표현이 무색한 한 해처럼 보이지만 그나마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중심을 잡았다. ‘세월호 침몰 사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여간첩 조작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 현안은 물론이고, 살인, 미해결 사건 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슈들을 다뤘다. 지난 5월부터 방송을 시작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도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세월호 민간 잠수사의 소식을 전하는 등 탐사 보도의 새 주자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시사 ②] 쟁점 사라진 토론
언론이 민감한 이슈에 대해 입을 닫자 대중의 소통 창구인 공론의 장이 좁아졌다. 사실 공론의 장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방송사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은 의제 설정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데일리 뉴스보다 심층적으로 아이템을 다뤄 ‘이슈 메이킹’을 하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이 얼마나 이슈를 선점하느냐에 따라 언론사의 신뢰도도 좌우된다. 그러나 SNS와 같은 온라인 채널에선 정치․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이 활발히 오가는 반면 언론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MBC <100분 토론>과 JTBC <밤샘 토론> 등이 토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회를 멸균실로 만들려고 하지 마라”(<밤샘 토론>)는 발언은 화제를 낳았지만 ‘교과서 국정화’ 쟁점에 대한 공론이 꾸준히 이어지지 않았다. 중립성과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청와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정성 논란에 불을 지폈다.(<100분 토론>) 또 일부 종합편성채널에서는 ‘시사 프로그램’이라는 탈을 쓰고 ‘공론’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데 일조했다. 강용석 전 의원의 불륜 의혹 보도를 마치 중대한 사안인양 앞 다퉈 보도하고, 토론 주제로 삼는 등 선정성 논란을 자초했다.
이처럼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시들하다보니 대안 언론인 팟캐스트에서 정치 이슈들이 발 빠르게 회자됐다. 특히 <노유진의 정치카페>, <김어준의 파파이스> 등이 인기를 끌었다. 일례로 팟캐스트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회당 다운로드수를 살펴보면 <정치카페>의 경우 100만 다운로드에 달했다. 댓글 수도 3만 5000개 이상이 달렸다.(팟빵 기준) 팟캐스트가 언론이 조명하지 않는 시의성 있는 이슈들을 다루면서 누리꾼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진 것으로 해석된다.
[교양 ①] 올해 교양 다큐멘터리의 핵심 키워드는 ‘교육’
올해 교양 다큐멘터리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단연 ‘교육’이었다. 방송사들은 기존처럼 <슈퍼차이나>(KBS), <화장>(MBC), <감각의 제국>(EBS) 등 굵직한 다큐멘터리들을 선보이면서도 국내 교육 현안을 심층적으로 파악해 대안을 제시했다. 사교육 열풍 폐해에 이어 대학 입학 후 자살률까지 급증하자 방송사들이 교육에서 비롯된 사회적 병폐를 더 이상 제쳐둘 수 없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은 KBS <다큐1-교육 혁신 프로젝트>, <명견만리-교육의 미래>, SBS <SBS 스페셜- 바람의 학교>, EBS 다큐 프라임 교육 대기획 <시험> 등을 통해 조명됐다. 이들 프로그램은 교사와 학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교육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담았고, ‘바람의 학교’처럼 프로젝트 실험을 통해 교육 현장에서 접목할 수 있는 대안을 보여줬다.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늘 뒷전으로 밀려 있던 ‘교육’의 본질을 살펴보고, 환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교양 프로그램인 SBS <영재 발굴단>에서도 교육 방식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어릴 때 발견된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교육은 정해진 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콘셉트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학부모를 비롯한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지극히 진부해 보이는 ‘교육’이란 소재를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춤으로써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해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교양 ②] 생활 정보 다루는 ‘교양의 예능화’
교양 프로그램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선별해 시청자들에게 전한다. 시청자들에게 건강, 육아, 음식 등 맞춤형 생활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공익성이 강하다. 이러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흐름이 눈에 띈다. 여전히 시사·교양 장르에 편성된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예능의 수요로 인해 위기에 처한 교양 장르가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JTBC <썰전>이 ‘시사의 예능화’에 불을 지폈듯이 교양 프로그램 곳곳에서 예능적 요소를 확대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MBC <나의 머니 파트너: 옆집의 CEO들>는 경제 리얼 버라이어티 장르에 갇히지 않는다. ‘잘 벌고 잘 쓰기’ 위한 돈의 철학을 다루되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경제 전문가보다 4차원 매력을 지닌 심형탁, ‘재근언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성 넘치는 디자이너 황재근을 캐스팅해 시청자의 진입장벽을 낮췄다. ‘정보 전달’이라는 틀을 벗어던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재를 풀어내는 노력이 엿보인다.
과학을 소재로 한 교양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KBS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와 EBS <한 컷의 과학> 등 그동안 일회성 다큐멘터리 등으로 다뤄진 과학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됐다.
‘교양’의 키워드로 꼽히는 ‘책’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기존 KBS <TV, 책을 보다>에서는 작가, 평론가 등 전문가 패널이 등장해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교양의 정통적 요소를 살린 반면, tvN <비밀 독서단>에서는 입담 좋은 정찬우, 예지원 등 방송인이 출연한다. 이들은 솔직한 감상평과 반론을 이야기하며 책에 대해 수다를 떤다. 한층 가벼워진 ‘책 소개’ 덕분에 소개된 책들은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며 화제몰이를 했다. 이처럼 방송사들은 ‘교양의 예능화’에 힘을 쏟으며 대중의 인포테인먼트 장르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