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파는 일은 지식을 안내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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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KBS ‘TV, 책을 보다’ 100회 특집-나의 아름다운 작은 책방

<TV 책을 보다> 100회 특집(1월 11일 오후 11시 40분 방송) ‘제작후기’를 부탁받고 처음엔 다소 난감했다. 제작후기에는 어쩐지 필수적으로 보였던 과정상의 드라마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윗선(?)의 압력으로 특정인의 출연이 제지되었다든지, 해외 출장 가서 사고를 당해 막막했다든지….

하지만 이런 일들이 어찌 일반적인 상황일 수 있을까? ‘시바이’(상황 설정)로만 프로그램을 우려먹던 PD의 관성 탓이다. ‘나의 아주 평범했던 100회’ 제작 과정을 서술하기 전에, 책 프로그램의 의미에 대해서 먼저 짚어보겠다.

우선 “‘독서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가 궁금해 인터넷 창에 쳐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열거되었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습득, 인간과 자연, 사회에 대한 이해, 교양과 인격 향상, 단순한 즐기기 등. <주자어류(朱子語類)>(참고: 주희와 그 문인(門人)들의 학문상 문답을 기록한 책)에는 무려 ‘올바른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단다!

다소 거창하지만 대강은 이런 것 중 일부를 위해 책을 읽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책 소개 프로그램의 목적’은 무엇일까? 프로그램에 소개된 정말 ‘좋은 책’을 시청자가 사서 읽고 싶은 충동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쿡방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가 거기서 본 요리를 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100회 특집. ⓒ화면캡처

‘정말 좋은 책’의 기준은? 내 경우에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면 되었다.

첫째, 다수의 사람이 공유할만한 주제 의식이 있을 것. 둘째, 줄거리의 전개와 구성이 충분히 짜임새 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을 것. 사실 빤한 얘기다. 하지만 이런 빤한 얘기, 상식적 판단이 대체로 진리 아닌가?(최근 몇 년 사이,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었던 부분이 천만 뜻밖의 방식으로 뒤틀리면서 어이없었던 상황들을 생각해보라. 상식! 생각보다 소중하다.)

어쨌든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좋은 책’을 시청자에게 효율적으로 전하는 것, 사실 시청률보다도 중요한 부분이다. 좋은 책을 소개했지만, 그것이 독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프로그램의 목적이 온전히 달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TV 책을 말하다>(2001년 5월 2일~2009년 1월 1일) 시절부터 오랜 시간 고민하며 논쟁을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그 논의는 이거다 싶은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한 채 지금도 진행 중이다.

<TV 책을 보다> 100회는 기존의 제작 방식과는 약간 다르게 접근했다. 보통 하나의 책을 선정, 그 내용과 의미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방식이었다면 100회는 ‘동네 작은 책방’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득세로 거의 고사 위기에 처했던 동네 작은 책방이 최근 하나 둘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의 본질적 의미와 다양한 형태들을 다뤄보고 싶었다.

100회 특집. ⓒ화면캡처

이 작은 책방들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동네 책방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동네 책방 중 다수는 학생들 참고서를 주로 파는 영세한 가게들이었다. 책방 주인의 생계를 위한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 다양한 양서의 유통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실패했다. 바로 그러한 문화적 실패가 동네 책방의 경제적 몰락을 가져온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새로 생겨난 작은 책방들은 단순히 책만 파는 경우가 드물다. 저자와의 대화는 기본이고, 어떤 때는 음악 공연을 하다가, 일상적으로 보기 힘든 영화나 독립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기도 한다. 지역 예술가들의 이색적인 작품을 전시하기도 한다. 북카페처럼 커피를 파는 것은 물론, 술을 파는 책방도 많다.(취재했던 책방 중 하나는 이름이 ‘퇴근길 책 한 잔’이다) 경치 좋은 전원마을에 자리 잡고 책에 파묻혀 하룻밤을 보내는 ‘북스테이’ 형태의 책방도 있다. 사람들을 책으로 유인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동네 책방들은 그 이름처럼 책방이 위치한 동네 주민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가고자 한다. 어떤 책방에서는 동네 주민 회의가 열리기도 하고, 희망자의 신청을 받아 공예교실을 운영하기도 한다. 어떤 책방은 지역 상점들과 연계해 동네 지도를 만들면서 동네의 정체성을 리뉴얼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책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공간이자 지역민들의 교류를 위한 사랑방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은 책방이 대형서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적 전략이기도 하다. 취재를 하면서 이런 책방이 우리 집 주변에 없는 게 내내 아쉬웠다.

100회 특집. ⓒ화면캡처

방송사 스튜디오를 벗어나 외부에서 녹화를 진행하기로 했다. 주제에 부합하는, ‘작은’ 책방을 녹화 장소로 물색했다. 그러나 작은 책방은 그 많은 촬영과 조명 장비, 스태프들을 수용하는 게 애초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대형 서점을 섭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음에 드는 녹화 장소를 찾기 위해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까지 내려갔다. 대략 15개 이상의 책방과 북카페, 도서관을 돌아다녔다(제작일지를 보니 답사로 체크된 날만 6일이었다). 공간의 여유가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북카페나 도서관도 딱 떨어지는 장소는 많지 않았다. 일부 조건이 맞으면 일부 수틀리는 부분이 있었다. 함께 다니던 차량 기사 분이 부동산 보러 다니는 거냐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던 중 같은 팀 선배가 용인에 있는 한 사설 공공도서관을 추천했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아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답사를 갔다. 화면의 이미지보다 더욱 매력적이었다. 카메라 팀의 최종 확인을 거쳐 바로 결정했다. 사실 새로운 책방들에 대한 정보를 처음 줬던 것도 이 선배였다. 프로그램의 기획에서 마무리까지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셈이다. 이 기회에 감사드린다.

해외 취재도 진행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몽톨리유라는 작은 책마을이다. 2015년 12월 9일 오후 2시,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입국심사장,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수십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파리에 여러 번 왔지만 이렇게 한가한 공항 풍경은 처음이었다. 타고 온 에어프랑스도 텅텅 비어서 의자 4개에 다리를 뻗고 누워 왔다. 한 달 전 파리 시내에서 있었던 IS 테러의 영향인 듯싶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IS가 무서워서…? 아니 그것보다는 취재 간 책마을에서 아무도 못 만날까봐…. 오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막했다. 더구나 12월은 책마을로서는 비수기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00회 특집. ⓒ화면캡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페인 국경 근처 몽톨리유로 내려갔다. 차로 9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남프랑스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몽톨리유의 주민은 약 800여명, 이 작은 마을에 책방만 15개가 된다. 화가, 조각가, 공예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공방도 있다.

천만 다행으로 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적지 않았다. 저마다의 개성으로 무장한 책방들은 활기가 넘쳤다. 책방을 찾은 한 여성 고객에게 물었다. 온라인으로 클릭 한번만 하면 살 수 있는 걸 왜 여기까지 와서 사냐고. 그녀가 대답했다. 책방에 오면 원래 찾으려고 했던 책 말고 다른 책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그리고 그게 독서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20여 년 전 몽톨리유를 책마을로 만드는 작업을 주도했던 자크 할아버지는 대형 마트에서 당근, 파프리카와 함께 책을 파는 풍토를 개탄했다. “책이란 그렇게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책이란 그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게 진짜 필요한 사람인지 살피면서 팔아야 합니다. 책을 파는 행위는 지식을 안내하는 행위입니다.”

▲ 홍기호 KBS PD. ⓒ언론노조

프랑스 시골마을의 촌로가 책 소개 프로그램의 본질적 고민을 다시 일깨웠다. 우리는 정말 좋은 책을 선별한 것일까? 우리는 그 책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했나? 그것은 효율적인 방식으로 시청자에게 전달되었나? 그 결과 시청자의 독서 생활은 풍요로워졌나? 최종 사운드 믹싱을 마치고 테이프를 입고할 때까지 답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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