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인류의 뿌리를 탐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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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영상미래학 ④]

[글 싣는 순서]

1. 영상인문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2. 자연과학이 밝혀준 사실(fact)에서 출발
3. <인류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류를 보다
4. 빅히스토리로 본 영상인문학의 가능성
5. 지구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 - <인터스텔라>, <마션>, <엘리지움>
6. SF, 인류의 뿌리를 탐구하다
7. 영상, 인문학을 대중화하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침팬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인류학자들은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들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촌격인 침팬지를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를 알기 위한 단초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침팬지는 인류의 ‘살아있는 링크’라 부른다. 신동화 PD가 연출한 S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3부작 <침팬지, 사람을 말하다>(2008)는 이런 의미에서 훌륭한 영상인문학에 해당된다.

▲ 다큐멘터리 <침팬지, 사람을 말하다>를 토대로 신동화 PD와 백종호 기자는 책도 펴냈다. ⓒ자연과 치유

침팬지는 600만 년 전에 우리와 갈라져 나와서 여전히 아프리카에만 살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숲에서 초원으로 나와 전세계로 퍼져서 살게 되었는가? 우선, 뇌용량의 차이가 떠오른다. 우리는 약 1,200~1,300cc 정도 되는데 침팬지는 400cc 정도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여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뇌용량이 급격하게 커졌다. 에너지를 쉽게 많이 분해할 수 있게 됐고, 다른 동물들에 비해 쉽게 소화할 수 있고, 그래서 내장이 짧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회적인 원인이다. 인간은 다른 개체들의 마음을 읽고 집단을 유지하는 능력을 키우면서 뇌용량이 커졌다. 집단 생활은 엄청난 이득도 주지만 엄청난 문젯거리도 야기하는데, 이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 뇌가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영장류는 무리지어 살게 돼 있다. 집단의 규모는 뇌용량에 따라 커지는데, 뇌용량 400cc 정도의 침팬지는 최대 50마리, 뇌용량 1,300cc인 호모 사피엔스는 최대 150명의 무리를 이루며 살아왔다. 인간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협력할 수 있는 것은 신념과 가치의 체계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150명이란 자연 집단의 한계를 너머 수천, 수만, 수억 명의 타인과 협력할 수 있었고, 이 협력을 통해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인류는 신화, 종교, 이데올로기 등 허구를 만드는 능력 때문에 서로를 연결할 수 있었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됐다.

진화생물학자 장대익 교수는 2015년 5월 PD인문학포럼에서 ‘모방 능력’과 ‘사회적 학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인간은 생명의 나무에서 가장 늦게 가지 쳐 나온, 막둥이 같은 존재다.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인류는 모두 멸종했지만  20만 년 전에 나온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아서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모방 능력을 통해 밈(meme)이란 것을 만들었고, 생물학적 존재를 너머 자유, 민주, 정의, 평화 같은 이념들을 위해 사는 엉뚱한 종이 됐다. 돼지가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인간은 자연스럽게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한다. 외계인 학자가 와서 인간을 탐구하면 이런 행동들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지 않을까?

인간이 지구 위의 모든 동물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번창한 이유는 공통의 도덕 매트릭스 속에서 함께 살고, 거래하고, 신뢰하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베푸는 아량은 “사람들이 동료 종교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단단히 얽혀 있는가” 하는 점과 관계가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소속감이다. 종교와 같은 도덕 매트릭스를 떠나 자기 내면의 도덕 나침반에 의지해서 사는 무신론자는 아노미(anomie)에 이르기 쉽다. 사회가 개인과 연결된 끈을 놓아버리고 개인들이 맘대로 살아가게 내버려 둘 경우, 행복감의 저하와 자살의 증가로 연결되기 쉽다. 유럽 최초의 무신론 사회, 즉 공산사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성이 낮은 체제였다.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은 눈치를 진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눈썰미를 진화시킨 건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결과이다. 이것을 ‘사회적 학습’이라 부른다. 침팬지도 학습을 하지만, 거의 다 개인 학습이다. 반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다. 남의 좋은 점을 재빨리 배워 와서 스탠더드를 확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조상들이 이룬 업적 위에서 시작했고,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이뤄낸 업적 위에서 또 시작한다. 인간은 소셜 마인드를 진화시켰기 때문에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 남은 반면, 또 다른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은 왜 멸종의 길을 걸었을까? 네안데르탈인이 갖지 못한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네안데르탈인은 30만년 전 유럽에서 진화했다.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에 들어와서 이들과 마주친 건 약 3~4만년 전이다. 두 인류는 약 5천년 동안 공존했다.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은 살아남아 유럽인의 조상이 됐지만 네안데르탈인은 약 3만년 전 멸종의 길로 접어들었다. 유럽 사람들은 네안데르탈인에 대해 꽤 관심이 높은 것 같다. 자기 지역에 살던 직계 조상의 사촌이기 때문일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특성, 멸종 원인, 크로마뇽인과의 만남을 연구한 책들이 꽤 많이 나와 있다. 스티븐 미슨의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브라이언 페이건의 <크로마뇽>, 후베르트 필저의 <최초의 것> 등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책들 덕분에 그들의 삶을 꽤 자세히 알 수 있다.

SF영화는 이제 미래 뿐 아니라 과거로도 시간여행을 보내준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의 만남을 그린 마르크 클라프진스키의 소설을 텍스트로 만든 영화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자크 말라테르 감독, 2010)는 이 흥미진진한 시간여행의 좋은 안내자가 된다. 이 영화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만난 네안데르탈인이 어떻게 멸종의 길을 걸었는지 탐구한 영상인문학이다.

▲ 프랑스 영화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2010)

이 영화에서 크로마뇽인(人) 부족의 늙은 샤만은 네안데르탈인(人)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그때 우린 낯선 종족을 만났어. 머리가 큰 인간들이었지. 곰처럼 으르렁거렸고, 손으로 말을 했지. 무척 혼란스러웠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니 말야. 그들은 수가 적었고, 그 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넓은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어. 그들도 우리 같은 인간을 본 건 처음이었나 봐. 우리처럼 무척 놀랐다고 하더군.”

사람은 사람인데 종류가 다른 사람, 첫 만남은 어땠을까? 영화에서 크로마뇽인들은 낯선 네안데르탈 소년 아오를 경계하고, 심지어 적대시한다. 크로마뇽인 사냥꾼 카 마이는 처음 마주친 아오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자의 목소리는 동물이 내는 소리와 같고, 피부는 부분적으로 털에 덮여 있습니다. 그는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그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를 죽이거나 그가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양쪽 다 사냥과 채집으로 먹고 사는 건 비슷했지만, 언어가 덜 발달한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의 눈에 ‘곰 인간’으로 보였다. 크로마뇽 여성 아키 나아는 위기에 처했을 때 네안데르탈 소년 아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처음엔 의사소통이 안 되지만, 감사와 신뢰가 쌓이면서 마음을 열게 된다. 아키 나아는 아오를 변론한다. “이쪽은 아오예요. 사람이에요.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 한쪽에 살던 고대인이에요. 이 사람이 절 보호해 줬어요. 저와 아기를 위해 사냥을 해 주었어요.”

네안데르탈 소년 아오는 새(鳥) 부족, 호수 부족 등 크로마뇽인들 사이에서 우정과 갈등을 경험한다. 크로마뇽인 여성 아키 나아는 아오와 몸을 섞어 아기를 낳는다. 아오가 애타게 찾는 고향의 부족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잠시 떠난 사이,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모두 죽은 게 아닐까.

▲ 마르크 클라프진스키의 소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

네안데르탈은 체격이 다부지고 억셌다. 처음부터 폭력으로 싸웠다면 크로마뇽인에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외모는 현대인 중 골격이 굵고 땅딸한 사람과 비슷했을 것이다.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 채 지하철역에 서 있으면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겠는가? 두 인류의 외모는 아놀드 슈와르제네커와 우디 앨런에 비유할 만하다. 처음 마주쳤을 때 네안데르탈인은 백인이고 크로마뇽인은 유색인이었을 것이다. 서양 인류학자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지만, 유럽에서 오래 살아 온 후기 네안데르탈인은 적은 일조량으로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도록 피부가 희게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터키 일대를 거쳐 유럽에 갓 이주해 온 초기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는 여전히 유색인이었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나무에 돌을 매달아서 사슴과 토끼, 오리와 메추리, 돌고래와 바다표범을 사냥했고, 홍합과 삿갓조개를 채집했고, 불을 사용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먹이사슬의 꼭대기 지위를 누렸지만 생존 조건이 몹시 거칠었다. 사냥하다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아서 30살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들은 다친 사람들을 보살폈고, 죽은 이를 꽃으로 장식해서 매장했다.
 
후기 네안데르탈인과 초기 크로마뇽인의 석기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두 인류는 활은 없었지만 창은 사용했다. 크로마뇽인의 창은 작고 날렵했다. 힘껏 던져서 멀리 있는 동물을 잡을 수 있었고, 집단 구성원이 협동하여 사냥을 하는데 익숙했을 것이다. 창이 작은 만큼, 큰 동물 한 마리를 여러 명이 함께 공격하곤 했을 것이다. 반면, 네안데르탈인의 창은 크고 투박했다. 사냥감과 마주보거나 등에 올라타서 격투하듯 찔러야 했기 때문에 사냥하는 도중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두 인류가 일대일로 권투나 레슬링을 벌인다면 네안데르탈인이 이겼겠지만, 집단으로 맞붙는다면 크로마뇽인이 유리했을 것이다.
    
가장 큰 요인은 문화와 소통 능력의 차이였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크로마뇽인이 언어를 사용한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못했다. 크로마뇽인은 다른 부족을 만났을 때 한쪽이 “알로?” 하고 다른 쪽이 “올라?” 하면 적대행위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아오?” “오아?” 허밍 수준의 말밖에 할 줄 몰랐다. 인간의 언어 능력을 결정하는 FoxP2 유전자는 두 인류가 같았지만 뇌에 작은 차이가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전두엽이 커서 기억력과 공간 지각력은 뛰어났지만 두정엽, 측두엽이 조금 작아서 다양한 정보를 엮는 통합적 사고력이 떨어졌다.

▲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외모는 아놀드 슈와르제네거와 우디 앨런에 비유할 만하다.

언어는 개인의 사고 능력 뿐 아니라 집단 내의 소통 능력과 직결된다. <최초의 것>을 쓴 후베르트 필저는 “소통하고 협력하는 능력이 생존 비결”이라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 음악, 미술, 의복의 발전을 통해 튼튼한 정체성과 넓은 사회관계망을 이뤘기 때문에 살아남아 우리의 조상이 됐다.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과 접촉하면서 뒤늦게 옷, 장신구 등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쇠락의 길을 되돌릴 수 없었다. 두 인류의 만남과 경쟁, 그리고 최종 결과를 다룬 다큐멘터리 <인류, 20만년의 여정>이 BBC 월드에서 방송된 바 있다. 이 작품도 엄연한 영상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영상, 인문학을 대중화하다
 
졸저 <ET가 인간을 보면?>을 준비하면서 정신이 가장 맑을 때 글을 쓰고, 글 쓰다가 피곤해지면 책을 읽고, 책 읽다가 피곤해지면 유투브에서 주제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찾아서 되풀이 보았다. 에피큐로스와 양주(楊朱)에 대한 동영상은 물론,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 <인류가 사라진 세상> 등 전혀 예상 못한 흥미로운 동영상도 그러던 중에 발견했다. 인류 문명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수없이 많다. 공부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러한 ‘영상인문학’을 활용할 수 있다.

새로 만들어진 용어인 ‘영상인문학’은 누구나 친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SNS를 통해 널리 전파할 수도 있다. 꼭 1시간 짜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5분 짜리, 60초짜리 등 다양한 형식과 기법의 인문학 콘텐츠가 앞으로 점점 더 확산될 것이다. 냉장고에서 음식 꺼내듯 언제든지 자연과학의 지식을 활용해서 인간을 성찰할 수도 있다. 각자도생의 어두운 세상이지만, 영상인문학의 대두와 함께 얼마든지 혼자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면, 인류의 사상이 만개한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에 대한 영상인문학이 가능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영상인문학도 물론 생각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빅히스토리의 관점에서 쓴 인류사인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미래를 비교적 낙관한다. 그는 의료 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고, 대체 에너지 개발로 환경 오염이 해소되고,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인공 지능이 활약하고, 지구 제국이 출현하여 대규모의 전쟁이 사라질 걸로 예측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도 좋은 영상인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채훈의 영상미래학 다른 글 보기]

[참고한 책]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김영사
<성장의 한계>, 도넬라 H. 메도즈 외 지음, 김병순 옮김, 갈라파고스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초협력자>, 마틴 노왁 & 로저 하이필트 지음, 허준석 옮김, 사이언스북스
<생물학 이야기>, 김웅진 지음, 행성B이오스
<2015 PD인문학포럼 자료집>, 한국PD교육원 펴냄
<지구를 떠납시다>(?), 이채훈, PD저널, 2014. 6. 2
<걸리버의 한국여행>(2), 이채훈, PD저널, 2014. 4. 7

*글쓴이는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방송대상, 통일언론상을 수상했다.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인문학과 클래식으로 이 시대 PD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ET가 인간을 보면> <이마에 아저씨의 토닥토닥 클래식> <음악가의 연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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