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과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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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과의 여행
[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 승인 2016.03.0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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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나는 참 복이 많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참 복이 많다’로 시작되는 몇 편의 글이 떠오른다. 그래도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물리지 않겠다. 복 중에 친구 복 많은 것을 자랑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는데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우정이 쉰 줄 넘어 더욱 깊어가고 있다. 게다가 내가 암이라는 병에 걸리고 난 후, 친구들은 급속도로 결속 감을 다지며 서로 단단한 우정을 확인하고 있어서 우정의 가교를 이어가는 데 제법 역할을 다하는 중이라고 자부하는 중이다.

금옥, 진숙, 미라는 유독 학창시절부터 여행을 자주 다니던 사이다. 나와 진숙, 금옥은 초등학교 시절 KBS 남원방송국 어린이 방송을 전담하면서 더욱 친해졌고, 중학교에서는 내가 연대장을, 금옥이가 선도부장을 맡아 학교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교 수석을 도맡았던 진숙은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서 미술부 활동을 하며 역시 미술대회 상을 휩쓸던 미라와 가깝게 지냈다. 금옥이와 나는 남원여고 동창이 되었고, 진숙과 미라는 전주에서 같은 학교를 배정받아 역시 동창생이 되었다. 미라 네 가족은 전주로 이사를 하였지만 진숙은 휴일이나 방학 때 자주 집에 내려오곤 했다. 우리 집이 남원역 앞이어서 친구가 온다고 하면 우리 집에 모여 아랫목에 발을 묻고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러다 누군가 기차를 타고 여수를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고 곧 실행에 옮겨졌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마가린과 딸기잼을 듬뿍 바른 옥수수빵을 챙겨 들고, 보온병에 프리마와 설탕을 진하게 탄 커피까지 챙겨서, 나와 진숙 금옥은 새벽기차에 몸을 실었다.

▲ 여행스케치 1집

여행을 떠나 기차를 타고 들판을 넘어 산속 계곡따라
자연을 벗 삼아 노래도 불러보고 동굴 속에서 소리도 쳐보네
잔뜩 짊어 메고서 시내버스의 몸을 실고서
동네 어귀에도 내려볼까 그렇지만 바닷간 어떨까
우리가 떠나는 여행스케치
이제는 저물어 노을은 지지만 잊지는 못할거야 아름다운세상
우리들의 여행스케치

(여행스케치노래 <여행스케치> 노래 가사 일부)

여수 오동도에서 해녀들이 갓 잡아 건진 해삼과 세발낙지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우리는 달고 느끼한 토스트와 쓰고 진한 커피로 일출을 맞이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계속되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남원에서 익산 서대전을 거쳐, 대전역에서 부산 가는 기차를 갈아타는 기염을 토하며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부산진역에 내렸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는데 우리처럼 밤차를 타고 온 젊은이들이 역 앞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기가 어찌나 독하던지, 지금도 부산역 모기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대학교 4학년 여름에 진숙이가 서울로 초대해서 미라가 합류한 가운데 진숙이 자취방에 네 명이 모였다. 미라 어머니가 김치를 담가 보내셨는데 3박 4일 동안 미라 네 김치 통만 붙들고 살다가 김칫국물까지 싹싹 쓸어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처음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놀이기구도 타고, 현대국립공원 미술관도 구경했다. 경비는 진숙이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과 서울대공원 직원이던 진숙이 오빠의 협찬으로 이뤄졌다. 진숙이가 다니던 서울대학교 교정도 둘러보고 하이힐을 신고 관악산을 활보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진숙이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나는 신문기자, 금옥과 미라는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느 해 겨울, 우리는 섬진강을 찾았다. 경남 하동의 여관방은 차가웠지만 우리들의 수다는 뜨거웠을 것이다.

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으로 찾아오라던
이왕이면 더 큰잔에 술을 따~르고 이왕이면 마주 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혀 보자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하려마 가장 멋진 웃음으로 대답해 줄께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년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에 가자
가장 멋진 내 친구야 빠뜨리지 마 한다스의 연필과 노트 한권도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탄다

(이연실 노래 <목로주점> 가사)

▲ '목로주점'이 수록된 이연실의 앨범

어찌 지리산 천은사까지 찾아갔을까. 느닷없는 폭설로 발이 묶여 동네 어귀 작은 점방에서 시내버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진숙이가 대학 교수에 임용된 것을 기념하며 아이들과 떠났던 남원 여행과 광한루에서 금옥이 아들 재원이가 그만 얼음물에 빠졌던 사건이며, 남원 양림단지에서 아이들과 썰매를 타고 놀던 추억도 고소하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함께 모일 기회는 줄었지만, 가끔 금옥이나 미라가 전주를 찾을 때면 한옥마을에서 짧은 전주여행을 누리곤 했다. 몇 년에 걸쳐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동안 각자 짧은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금옥이가 드디어 큰아들에 이어 올해 작은딸까지 대학진학을 마무리 지었다며 자유를 선언함과 동시에 집결 통지서를 보냈다. 이번에도 전주 한옥마을이다. 금옥이가 교사생활을 하면서 아들딸 뒷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한 덕분에 두 아이가 명문대에 입학했다. 그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에게 집중한 금옥이를 위로하고 축하하는 자리, 금옥이는 저녁 식사 후 식당에서 내어온 식혜를 두 사발이나 들이켰다. 식혜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했다. 아, 금옥이가 식혜를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가깝게 지내도 50여 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금옥이는 나물 반찬도 잘 먹었다.

진숙이는 하루 한 끼만 먹을 때가 많다고 했다. 밥맛도 없고, 밥 먹을 시간도 없으며 심지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운 것이다. 누가 챙기지 않으면 굶기에 십상이다. 얼마나 바삐 살면 저럴까 싶어 짠했다. 미라는 생선을 싫어한다. 나도 생선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특히 생선 다루는 게 서툴고 특히 생선 비린내가 싫어서 집에서는 잘 먹지 않는 편이다. 미라도 그렇다고 한다. 남이 해주는 건 맛있다고 했더니 미라도 그렇다고 했다.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숙소로 돌아와 이부자리를 펴고 친구들에게 가져온 마스크 팩을 붙여주었다. 하나하나 마스크 팩을 붙이며 친구 얼굴을 들여다본다. 금옥이는 몇 년 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얼굴에 유리 파편 자국이 몇 개 남았다. 얼마나 큰 사고를 겪었을지 짐작이 가고 그때 친구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 미라 역시 허리 수술을 했다고 한다. 큰 수술을 했는데 문병도 가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진숙이는 얼굴에 윤기가 없고 푸석푸석하다. 가르치랴, 논문 쓰랴, 학교 사업하랴……. 워낙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드러난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의 과거가 드문드문 생각난다. 신기하게도 장면 장면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효과로 더해지는 걸 보니 우리들의 과거가 즐거웠던 모양이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
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
사랑이 날 떠날땐 내 어깰 두드리며 보낼줄 알아야 시작도 안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가끔 서운케 해도 못 믿을 이세상 너와 난 믿잖니
겁없이 달래도 철없이 좋았던 그 시절 그래도 함께여서 좋았어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게 변해도 그대로 있어준 친구여
세상에 꺾일 때면 술 한잔 기울이며 이제 곧 우리의 날들이 온다고
너와 마주 앉아서 두 손을 맞잡으면 두려운 세상도 내 발아래 있잖니
눈빛만 보아도 널 알아 어느 곳에 있어도 다른 삶을 살아도
언제나 나에게 위로가 돼준 너
늘 푸른 나무처럼 항상 변하지 않을 널 얻은 이 세상 그걸로 충분해
내 삶이 하나 듯 친구도 하나야

(안재욱 노래 <친구> 가사 일부)

고즈넉한 전주 한옥마을에서 별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건 우리의 웃음소리 때문이다. 40년의 이야기가 샘이 마르지 않고 앞으로도 50년은 좋이 얘깃거리가 풍성할 우리 친구들. 누군가 “다리 힘 풀리기 전에 우리끼리 해외여행 가자”라고 제안했고 일제히 그러자고 뜻을 모았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던가. 그 오랜 세월, 한 번도 다투거나 갈등을 일으킨 적 없는 내 친구들,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과 새로운 도전으로 늘 싱싱하고 건강한 기운을 선사했던 좋은 친구들, 봄처럼 싱그러운 그들이 있어서 참 행복하다. 새봄, 그녀들과의 또 다른 여행이 사뭇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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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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