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야위어가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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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민 PD의 끼적끼적] 영화 '헝거'

ⓒ영화 <헝거> 스틸 이미지

영화 시사회에 초대 받았다. 노조 앞으로 티켓이 몇 장 왔는데 마침 다들 바빠서 졸지에 노조 대표 관람객이 되었다. 제목은 <헝거Hunger>. 1980년대 영국 정부로부터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요구하던 IRA 단원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이 수감된 교도소만을 비춘다. 교도소 내 정치범 지위 보장을 요구하는 IRA 단원들의 투쟁과,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66일의 단식 투쟁으로 끝내 목숨을 포기한 ‘보비 샌즈’의 실화가 영화의 내용이다. <노예12년>과 <셰임>의 스티브 맥퀸 감독과 어느덧 헐리우드 대표 배우가 된 마이클 패스밴더의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국에서는 2008년 개봉했던 영화가 8년이나 지나 한국에 들어왔다. 영화의 울림이 좀 더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기다렸던 걸까.

시사회란 게 그렇다. 정식으로 개봉하기 전에 먼저 영화를 보여준다는 건, 먼저 보고나서 어디서든 영화 얘기를 이러저러 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영화도 인상적이었던 바, 어떤 얘기들을 할 수 있을까 혼자 고민을 해봤다. 정치적 지위를 위해 목숨까지 포기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신념. 숭고한 이야기다. 그런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영화가 준 강렬한 인상은, 감동보다는 고민을 얹어주었다.

가장 큰 이유는 IRA라는 단체가 생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를 고스란히 관통하며 전개되어 온 영국 연방의 정치분쟁사는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이야기다. 같은 시기 한국의 근현대사도 충분히 복잡했는데, 미국, 중국, 일본 등과 달리 그 복잡한 역사와 직접적인 고리가 없어서 더욱 그럴 거다. 아주 간간히 접하게 되는 외신의 보도는 영국 주류의 시선을 대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단편적인 조각들에 비친 IRA는 영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 조직 정도의 이미지였다. 실제로도 IRA는 꽤 오랫동안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해오며 크고 작은 테러를 일으켰으니 아주 호도한 것은 아닌 셈이다.

영화가 끝나고 돌아와 IRA에 대한 자료들을 조금 찾아보았다. 영국 연방에 속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정치적 갈등은 어렴풋이 들어온 이야기다. 이 모든 과정과 그 속의 IRA에 대해 이해하려면 20세기 영국사를 통째로 공부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들은 분명 있었다. 영국의 공수부대가 평화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4명의 사상자를 냈던 ‘피의 일요일’ 사건이나, 폭탄테러범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15년 동안 징역을 살았던 ‘제리 콘론’ 4인방 사건 등은 무장 투쟁을 부추길 만큼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제리 콘론의 경우는 무고한 다른 가족들까지 억울한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는데,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석방되기 8년 전에 이미 옥중에서 결핵으로 사망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딘지 한국에서도 익숙한 서사 다. 이 끔찍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실 근현대사까지 오지 않더라도 수세기에 걸쳐 영국의 침략을 받고, 400년의 식민시기를 거치며 개종을 강요받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등 수없는 수모를 겪은 아일랜드의 역사는 문화를 넘어 능히 공분할 수 있는 이야기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한국인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폭력과 불법은 어떤 경우에라도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 말을 하는 주체가 남의 나라 주권을 멋대로 빼앗았거나, 권력을 동원한 ‘합법적인 폭력’으로 정당한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다면 이미 그 말이 폭력이다. 일견 단호한 정의 같아 보이는 저 말이, 일제 식민 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을 깎아내리는 데 동원되는 것 또한 여러 번 본다. 그 말을 하는 이들은, 비교도 못 할 만큼 더 큰 제국주의의 폭력에는 어째서 눈을 감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그리는 신념 앞에 망설이게 만들었던 것은 IRA가 벌였던 여러 차례의 민간인 테러였다. 신념을 말하고 주권을 되찾기 위해,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 <헝거>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싸우는 신체 자체에 집중하며, 그것이 얼마나 처절한지 지켜볼 수 있는 거리를 허락한다. ⓒ영화 <헝거> 스틸 이미지

눈 딱 감고 그냥 산다면 몰라도, 세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골치가 갈려 나간다. 옳고 그름의 경계가 자로 그은 선처럼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다면 세상 편할 텐데. 그게 아니니 이토록 답답스런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옳음 자체 보다는,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고민하게 됐다. 그게 더 선명해 보였다. 덜 위험해 보였다. 영웅이 될 마음은 없지만 양아치만 되지 않아도 부끄럽지는 않은 삶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늘 모든 결정은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데 초점이 모였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IRA의 분노는 정당하지만,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킨 행동 앞에 그 모든 분노를 신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중동의 이슬람 문명은 테러리스트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소비되지만, 그 분노의 근원을 따라가면 역시나 팔레스타인 땅에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이들을 들쑤시고 들어간 유대인들과 이를 도운 국제사회가 있다. 무고한 이들을 향한 테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먼저 때린 놈들은 항상 너무나 우아하다. 영화 <암살>의 영웅들이 폭파시킨 주유소 사장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일 거다. 한 치의 과오도 없는 신념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헝거>의 카메라는 담담하다.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투쟁하는 IRA 단원들과 보비 샌즈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딱히 그들의 편을 열심히 들지는 않는다. 숭고함을 덧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무하다 싶을 만큼 싸우는 신체 자체에 집중하며, 그것이 얼마나 처절한지 지켜볼 수 있는 거리를 허락한다. 그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가는 또 다른 인간들, 교도관이나 진압대원들에게도 렌즈를 허락한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이들 쪽이다. 수감된 채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감정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수감자들의 메마른 눈빛은 차라리 인간이길 포기한 것처럼 비쳐진다. 지는 싸움, 버티는 싸움은 대개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 힘들어진다.

▲ 영화 <헝거>의 백미로 꼽히는 장면은, 죽음까지 각오한 단식을 앞둔 보비 샌즈와 그런 그를 설득하려는 신부가 설전을 벌이는 16분의 롱테이크다. ⓒ영화 <헝거> 스틸 이미지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장면은, 죽음까지 각오한 단식을 앞둔 보비 샌즈와 그런 그를 설득하려는 신부가 설전을 벌이는 16분의 롱테이크다. 롱테이크 양식은 단순히 긴 컷만을 뜻하지 않는다. 편집과 앵글을 통한 강요를 최대한 자제하고, 화면 속 요소들을 관객이 능동적으로 취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옆모습을 경직된 풀샷으로 잡은 이 길고 긴 한 컷은, 무심한 앵글만큼 대화마저 관조한다. 목소리는 조소와 격양을 오가지만 클로즈업 된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장면은 가장 긴 컷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말’이 살아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10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는 차가운 회색 벽 안에서 싸우며 시들어가는 육신만을 보여준다. 유의미한 언어가 살아있는 순간은 이 16분의 롱테이크 뿐이다. 왜 싸우는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치열하게 주고받는다. 옳은지 그른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하는지 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 언론의 카메라엔 그게 없다. 왜 싸우는지가 없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가 없다. 11월의 광화문을 비추는 카메라에도, 192시간 27분 동안 이어진 필리버스터를 비추는 카메라에도,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관객 스스로 말을 찾아내도록 하는 <헝거>의 담담한 롱테이크 풀샷은 없고 판단을 강요하는 클로즈업 인서트들이 이어졌다.

단식은, 낼 수 있는 마지막 목소리다. 목숨까지 담보로 삼으며 들어주길 바라는 목소리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상식이 전제되어 있다. 보비 샌즈의 66일 단식은 연일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81년 당시 한국의 지면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죽음 뒤로 아홉 명의 단원들이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내놓았다. 끝내 정치범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내가 당시의 영국민이었다고 상상해 봐도, 수차례의 살상 테러 사건을 지켜보며 정치범 지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신념을 짊어진 목소리가 반드시 옳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목숨을 걸면서까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상적인 창구는 어째서 없었는지를 돌아볼 만큼의 호소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2016년 한국의 눈에 이 영화는 어떻게 비칠까. 교도관들만 불쌍하다. 지가 선택해서 죽는 건데 뭐가 문제야. 익숙한 비아냥들이 벌써부터 귓전에 울리는 것만 같다. 아니 누군가 목숨을 걸고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스스로의 안위를 버린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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