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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항암 기간 중 잠시 직장을 쉬면서 제일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는 공방에서 도자기를 빚으며 마음을 채운 일이다. 시간이 많으니까 독서나 글을 쓰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토나 어지러움 때문에 책을 읽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큰 사물을 대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한 달에 두 어 차례 컨디션이 좋을 때면 도예를 전공한 후배가 운영하는 공방을 찾아 그릇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생활 도자기 공방 ‘하루’에서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참 좋았다.

▲ 평소 밀가루 반죽도 해보지 않았는데 밀대로 흙을 밀어보니 매우 재미있었다. 흙덩어리가 사람 손을 통해 형상을 갖춰 새로 태어나는 과정도 신기했다. ⓒ김사은

평소 밀가루 반죽도 해보지 않았는데 밀대로 흙을 밀어보니 매우 재미있었다. 흙덩어리가 사람 손을 통해 형상을 갖춰 새로 태어나는 과정도 신기했다. 흙으로 형상을 만든 후, 며칠 후 공구 등으로 거친 면을 다듬는 것이 더 어렵다. 표면을 고르게 잘 다듬어야 그릇이 예쁘게 만들어지는데, 흙이라서 갈라지거나 깨질 때도 있다. 언젠가 접시를 만들 때 흙을 고루 밀어야 하는데 한쪽 면이 지나치게 얇다 싶은 것을 무리해서 만들었더니, 기어코 한 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깨진 접시를 포기할까 하다가 접시 안쪽 면의 연꽃무늬가 아까워서 어떻게든 살려보기로 했다. 잘라져 나간 부분부터 홈을 파기 시작했다. 제법 모양새가 괜찮아지기 시작하여 내친김에 접시 모서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내었더니 접시가 꽃 모양이 되었다. 버려질 운명에서 오히려 멋진 작품으로 변신한 것이다. 시간과 공력을 두어 배 더 들었지만 파기될 뻔한 접시를 손에 붙들고 어떻게든 살려내려 노력한 것이 더욱 정교해 졌다. “맞아!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해야 실수가 없지.”라는 정석과 더불어 “그래!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재생의 기회는 있는거야.”라는 감상까지 얻어서 정말 기뻤다. 미완성은 또 다른 기회를 의미한다.

▲ 이진관 1집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은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해

(이진관 노래 <인생은 미완성> 가사 중)

흙을 만지는 감촉이 새로웠다. 어릴 적 미술 숙제를 한답시고 찰진 흙이 있다는 곳을 찾아다니던 추억도 만져진다. 지금은 문방구에서 진흙도 팔지만, 우리는 직접 흙을 채취해서 미술 시간에 가져가야 했었다. 어느 친구가 좋은 흙을 발견했다기에 주말에 그 친구를 따라 제법 깊은 산속에 들었다가 길을 잃은 적도 있었다. 심마니도 아닌데 수업용 진흙을 찾는다고 산속을 헤매는 사연이라니, 지금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고생한 덕분에 친구의 말대로 하얀색 찰흙을 잔뜩 짊어지고 집에 갈 때의 심정은 산삼을 발견해서 금의환향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게다. 그때 찰흙은 참으로 소중했으니까. 찰흙을 뒤뜰에 쌓아놓고 잡동사니를 만들어서 소꿉장난 하던 어린 시절의 나도 오랜만에 만나 보았다. 꼬막 껍데기나 사금파리 같은 살림살이가 제법 모양을 갖추게 된 것도 찰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솥도 만들고 밥그릇 국그릇 접시도 뚝딱뚝딱 만들었다. 담벼락에 걸친 작은 호박, 장독대에 핀 키 작은 채송화는 늘 풍성한 식탁을 도왔다. 얼굴이 넓적한 맨드라미는 우리 집을 찾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너그러운 햇살 아래서 그렇게 상 차려놓고 맨드라미와 겸상하며 먹는 한 끼 밥상! 참으로 푸지고 맛있는 밥상이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 해 놓고 조약돌로 소반 지어/ 언니 누나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호미 들고 괭이 메고 뻗어 가는 메를 캐어/ 엄마 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동요 <햇볕은 쨍쨍> 가사)

평범한 흙이 컵이나 접시, 대접 등으로 태어났다. 초보의 솜씨니까 당연히 울퉁불퉁하고 부족함이 많지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릇이어서 사랑스러웠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접시 하나씩 선물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릇의 품질을 떠나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집에서 식탁을 차릴 때도 내가 만든 도자기는 큰 역할을 한다. 무 김치나 포기김치를 올려도 맛있어 보이고, 칼로 포기를 잘라서 종지에 담아도 정갈해 보인다. 각종 장류도 고급스럽게 품어낸다. 그야말로 육, 해, 공 무엇이든 맛있게 수용한다.

지난 주말에는 콩나물 국을 끓여 내면서, 다진 깨와 파, 양파를 각각 그릇에 담아 스타치스 꽃과 함께 플레이팅 했더니 가족들이 “콩나물 국이라도 격이 다르다”며 아주 맛있게 먹어 주었다.

넓은 가슴이 즐겨먹는
사랑은 맛있어 달빛 젖은 햇살 머금은 세상의 선물
지켜줄께 아껴줄께 영원의 주문 You Make Me Feel Brand New
값진 사랑 반 쪽을 갈라 서로 나누어
언제나 가슴에 품고서 모든 순간 함께 해
웃음이 번지고 행복함은 넘치고 기쁨도 커지고

(휘성 노래 / <사랑은 맛있다> 가사 일부)

가지런한 자기에 담긴 콩나물 국 정식(?) 상차림을 SNS에 공개했더니, “자기가 예쁘다” “그릇이 멋있다” “밥맛이 절로 나겠다”는 댓글이 쏟아졌다. “저도 밥 주세요”라는 댓글도 재미있었다. 밥그릇과 국그릇만 있으면 웬만한 손님상을 차려 낼 정도가 될 듯하여 남편과 나, 두 아들 포함 언젠가 상차림에 함께 할 미래의 며느리까지 염두에 두고 8개를 빚기로 했다. 공방에 모인 사람들이 “막내아들이 고등학생인데, 언제 며느리를 보시겠느냐”며 한바탕 웃음 잔치가 펼쳐지기도 했다. 눈썰미 매운 며느리는 그릇 뒤까지 뒤집어 가며 꼼꼼하게 살피겠지 싶어서, 없는 며느리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고 뒷면까지 꼼꼼하게 손질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그렇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내가 만든 그릇에 밥도 담고 국도 담고 사랑도 담아서 맛있는 밥 먹는 날을 그려본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고 가슴이 뭉클하다.

음식솜씨는 부족하지만, 동서양 음식 가리지 않고 수용해 내는 도자기의 넓은 포용력을 담아 속 깊은 사랑으로 한 상 차려내고 싶다. 정갈하고 따뜻한 밥 한 끼, 마음으로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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