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텔 ‘킹경규’에게서 새로운 ‘쇼’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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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방’·‘낚방’ 등 무편집·느림의 미학…TV 속 TV의 실험이 만든 ‘새로움’

“무엇이 벌어질지는 계획하지 않는 거죠. 그저 카메라만 가져가면 됩니다. 장비를 갖추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봅니다. 우리는 시청자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는 느린 TV(Slow TV)가 이야기를 말하는 하나의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건 TV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느린 TV를 위한 좋은 발상이 됩니다. 사람들이 웃을 때 그건 매우 좋은 느린 TV 발상이 될 겁니다.”(TED 출연한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 토마스 헬룸 PD)

기존 TV 프로그램의 문법을 깨뜨리는, 모든 TV 규정을 거스르는 새로운 ‘리얼리티 쇼’의 탄생이라는 평가(아랍계 위성방송 뉴스TV 채널 알자지라)처럼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가 보여준 프로그램은 ‘쇼’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했다. 7시간 기차여행, 134시간 크루즈 여행을 방송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렸던 한국 시청자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 속 ‘킹경규’의 ‘눕방’과 ‘낚방’을 보며 ‘느린 TV’의 재미를 깨달았다.

▲ 지난 3월 13일 진행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MLT-23 인터넷 생방송 중. ⓒ화면캡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그저 바라보면~

노르웨이 NRK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별다른 편집이나 연출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청자들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했고, 어느새 스스로 ‘참여자’가 됐다. 노르웨이 NRK가 보여준 방송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마리텔> 인터넷 생방송이 보여준 것도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이 같은 지점의 가장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눕방’과 ‘낚방’이다.

지난 3월 13일 진행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MLT-23 인터넷 생방송에 첫 등장해 이른바 ‘눕방’(누워서 하는 방송)을 선보인 ‘킹경규’ 이경규씨. 3시간의 방송 시간 동안 이경규씨가 보여준 건 크게 누워있거나, 강아지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강아지와 함께 누워있거나 였다. 그럼에도 ‘킹경규’는 5명의 출연팀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눕방’으로 네티즌을 환호시킨 그는 지난 3월 27일 MLT-24 인터넷 생방송에서는 그의 취미 생활인 ‘낚시’를 3시간 동안 보여주는, 이른바 ‘낚방’을 선보였다. 이경규씨가 한 건 크게 떡밥을 끼우고, 저수지에 낚시대를 드리운 뒤, 입질이 오면 낚아챈 것이다. 3시간 동안 주구장창 낚시만 하고 ‘킹경규’는 또다시 1등을 차지했다. 도대체 왜일까.

‘킹경규’의 생방송을 본 네티즌은 스스로 해답과 의미를 찾았다. 연출과 자막, CG와 배경음악 등으로 가득한 편집 방송 속에서 연출도 자막도, CG와 음악 그 어느 것도 없지만 ‘무편집’(인터넷 생방송 한정)의 자연스러운, 다시 말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서 각자가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찾았다. 누워 있는 이경규 씨를 보며 오히려 자신이 ‘힐링’이 됐다는 네티즌의 반응이 그것이다.

▲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의 토마스 헬룸 PD의 TED 강연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텔레비젼…왜 이것이 엄청나게 중독적 일까요?’ 중. ⓒ화면캡처

평균 3.4초당 한 개꼴로 자막을 쏟아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자막 조사 결과) 예능 프로그램들과는 분명 다른 문법이다. 자막이 규정하는 방송의 즐거움 대신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마리텔> 생방송은 네티즌에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극대화된 ‘킹경규’의 방송은 이 같은 재미를 더하는 것이다.

생방송 과정에서 화면에 추가되는 것은 네티즌의 실시간 ‘채팅’ 화면이다. 누워있는 모습을 보든, 낚시하는 모습을 보든 그 안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는 건 네티즌의 몫이다. ‘낚방’을 보면서 낚시 상황을 분석하는 네티즌, 낚시 시작 전 3시간 동안 붕어 20마리를 잡지 못하면 입수하겠다는 공약을 떠올리며 잡은 붕어수를 세는 네티즌, 추위에 떠는 ‘킹경규’를 걱정하는 네티즌, 피라미를 스코어에 넣을 것인가 여부에 대해 고찰하는 네티즌 등 시청하는 사람들은 같은 화면을 두고 서로 다른 장면과 그림을 떠올리고 짚어낸다.

TV의 실험, TV 속 작은TV의 실험이 만든 ‘쇼’의 다양화

속도가 생명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느림’의 진수인 ‘낚시방송’이 네티즌들에게 인기를 얻은 것은 분명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마리텔>이 가진 ‘실험성’ 덕분이다.

<마리텔> 자체가 인터넷과 지상파 방송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포맷 실험에서 나왔고, <마리텔> 속에서는 ‘1인 방송’이라는 이름으로 5개의 작은TV들의 ‘실험’이 2주에 한 번씩 펼쳐진다.

‘눕방’, ‘낚방’은 무편집・실험적 방송이 극대화된 형태로, 이 같은 방송 실험이 가능했던 것은 애당초 <마리텔>이 ‘1인 PD(출연진)’에게 3시간 동안 자유롭게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시간’과 인터넷 혹은 무대라는 ‘공간’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리텔>의 연출자인 박진경 PD는 자신의 트위터에 “작은 방송국들의 모임 콘셉트 방송이다 보니 최종적으로 각 출연진 순서 정해서 배치, 편집하는 것도 편성 쪽 일하는 것 같고 재밌음”이라고 말했다. 연출자는 1인 방송 밖으로 벗어나 최대한 개입하지 않고, 이를 배치하고 본방송으로 가져와 편집하는 역할에 그친다. 전적으로 ‘1인 방송사’에 방송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 지난 3월 27일 진행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MLT-24 인터넷 생방송 중. ⓒ화면캡처

헤어, 메이크업, 음악, 애니메이션, 야구, 라면, 당구, 요리, 보컬레슨, 격투기 등 3시간 동안은 제작진의 간섭이 최대한 배제되는 ‘1인’ 내지 ‘작은TV’만의 시간이자 네티즌의 시간이다. <마리텔> 안에서 ‘1인 방송’의 형태로 개개인의 특성이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됐고, 이는 아이템의 다양화 내지 쇼의 세분화가 이뤄질 수 있는 계기로 이어졌다.

비록 본방송에서 자막과 CG를 화면에 덧입히고 3시간이 모인 15시간을 2시간 20여분 분량으로 축소(1회 생방송이 2회 본방송으로 나가므로)시키고 있지만, 기본 바탕은 ‘인터넷 생방송’이다. 마치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본편이 먼저 나가고 이에 대한 예고 내지 요약 형태의 방송이 편집과 자막, CG를 덧입힌 <마리텔> 본방송으로 시청자를 만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TV의 실험, 다시 <마이 리틀 텔레비전> 속 작은 TV들의 각각의 실험이 모이고 쌓여서 ‘눕방’과 ‘낚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쇼’의 실험 내지는 발전을 일군 것이다. 이 같은 작은TV들의 실험은 향후 개별 ‘프로그램’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리텔>은 그 자체가 ‘쇼’와 ‘예능’의 실험이자 시도다. 그리고 ‘킹경규’의 방송은 <마리텔>의 포맷과 실험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낸 방송이다. 이러한 점이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가 보여준 ‘느린 TV’의 실험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토마스 헬룸 PD가 말한 ‘느린 TV’의 재미, 그리고 <마리텔> ‘킹경규’가 보여준 ‘눕방’과 ‘낚방’의 재미, 네티즌이 ‘느린 TV’에 열광하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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