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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민 PD의 끼적끼적]

▲ ⓒpixabay

대뜸 행복하냐고 물어왔다. 촬영할 일이 생겨 지인에게 장비를 좀 빌리기로 했는데, 장비를 빌려주며 자기 후배들이 하는 프로젝트에 인터뷰를 좀 해줄 수 있냐는 거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 그러마 했더니 첫 질문이 저거다. 행복하세요? 뭔가 좀 엉뚱하다 싶었는데, 보아하니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프로젝트인 모양이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잘 모르겠어요.

행복에 대한 질문은 어렵다. 행복에 대한 정의도 사람마다 제각각일 뿐더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순간의 경험을 ‘행복’이라고 느끼지, 그 전에 행복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정리해놓지는 않는다. 행복이란 뭐다, 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럴 때 행복하더라 말하기는 쉽다. 다분히 사후적이고 경험적인 영역이다. 그러니 갑자기 지금 당장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선뜻 진심으로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지금의 상황에 나름 이것저것 의미부여도 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서가에서 책 제목만 읽고 고개를 끄덕해본 경험이 몇 번이나 있을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의 이유를 고스란히 설명해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나 한 사람의 삶만 돌아본다면, 얼마든지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어쩌다보니 뭔가 우여곡절이 많은 생활이 됐지만, 그것대로 재미있다. 넘치는 건 넘치는 대로,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만족할 만한 삶이다. 다만 눈길을 조금만 돌리면 도저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나는 행복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조심스러워질 정도다. 결국 저 홀로 사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는 것을. 정말로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의 이유는 또 있다. 난 내가 행복한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물론 행복한 순간들은 아주 많다. 3년째 함께 해오고 있는 연인과의 시간들이 그렇고, 약속이 없는 날 집에서 한가로이 읽는 책이 그렇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꿈결 같은 순간들이 그렇다. 그렇게 행복이 차오르는 순간에는 만끽하면 된다. 하지만 일상에서까지 내가 행복한가를 자꾸 되묻고 싶은 생각은 없다. 꽤 많은, 멘토를 자처하는 강사들이 청중들에게 ‘지금 나는 행복한가’ 자문하라 부추기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하루 빨리 변화를 촉구하라는 거다. 그런 말을 듣노라면, 마치 삶의 목적을 ‘행복’으로 수렴하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마땅한 대답이 없을 땐, ‘행복하려고’라는 말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선택지로 보인다. 많은 경우 이건 특별한 반론 없이 수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행복하려고 산다는 말에 나는 별로 공감이 가질 않는다. 여전히 행복의 정의는 제각각이겠지만, 대개 사람들이 만족스런 상태, 부족함 없는 아늑한 상태를 행복이라 여긴다면 그걸로 삶을 가득 채우기 위해 살아야할까. 내 경우라면 앞서 말한 그런 순간들. 그 순간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위해 살고 있느냐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 사는데 따로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그저 행복은 삶의 목적이라기 보단,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 아닐까. 행복하기 위해 산다기보다는,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는 것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고, 그 속에 빛나는 행복의 순간들이 알알이 박혀 있기 때문에 계속 살아낼 수 있는 것 아닐까.

비슷한 생각을 사람들을 보면서 한다. 세상이 완벽해질까. 차별과 불의, 소외와 빈곤이 사라지는 세상이 올까. 잘 모르겠다.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뒤쳐졌다 앞서갔다 하면서도 결국엔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나아진 세상을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뒤쳐진 시간에 눈을 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완벽한 세상은 오지 않을 거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오늘에 와서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동시대라 할 수 없을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많다. 국경을 넘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한참이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나아져 온 것 같지만, 한발 떨어져 보면 결국 지긋지긋하게도 똑같은 이유들에 매여 있다. 흑인과 여성과 유태인과 노동자와 장애인을 차별하기 위해 꺼내놓던 수십 수백 년 전의 답답한 말들이, 오늘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 손으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행복 같은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는 없어도, 곳곳에 박혀있는 행복의 순간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완전히 더 나은 세상을 만나기란 쉽지 않아 보여도, 지치지 않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 도처에 알알이 박혀 있는 사람들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으니. 행복한 순간들이 삶을 반짝반짝하게 해주는 것처럼, 행복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그래도 괜찮은 곳’으로 만들어 준다. 감사한 마음으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행복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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