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달 그리고 갑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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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카톡이 하나 들어온다. 일하는 시간에는 대부분 문자나 카톡을 무시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건 제목이 매력적이다. '품격의 전주, 시와 연애하다!'로 시작되는 모집공고다. 문화단체에서 인문학 강의를 개최한다는 내용이다. 좋은 강연도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하지만 공교롭게 한 두 번 이상 선약과 행사가 걸려있어 지원하지 못한 것도 많았다. 선배가 보내온 공고를 보니 매주 수요일에 걸쳐 다섯 번의 시작(詩作) 강의가 계획되어 있는데 강사들도 친숙한 분들이 많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일정이 없이 비어있는 상태다. 강의 주제와 강사도 끌렸지만, 고백건대 무엇보다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저렴한 참가비였다. 단돈 1만 원.

그렇게 1만 원의 참가비를 내고 매주 수요일 ‘시와 연애’할 준비를 했다.

‘연애하다’라는 직설적인 화법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깨무는 순간 벌거벗은 것을 발견하고 부끄러워지는 것처럼 어째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이다. ‘연애’라는 명사는 명사에 그치지 않고 무한한 상상력을 더하여 동사가 되어 머릿속에서 헤엄친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때 ‘연애’라는 말과 ‘이성 교제’ ‘문제아’ 등이 마구 뒤섞여 저속한 단어로 인지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연애는 천박하고 되바라진 문제아들이나, 건전하지 못한 교제 또는 스캔들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데 연애를 로맨스나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고 보면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누군가 일찍이 이 ‘연애’의 참 뜻을 제대로 전해주었더라면, 나는 젊은 날 ‘연애’함에 주저하지 않았을 텐데….

김세환 노래 <사랑하는 마음>을 <연애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불러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심장이 쫄깃해지는 것 같다.

▲ 가수 김세환 ⓒKBS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걸
사랑의 눈길보다 따뜻한 건 없을걸
스쳐가는 그 손끝마다 짜릿한건 없을걸
사랑의 눈길보다 따뜻한건 없을 걸
스쳐가는 그 손끝마다 짜릿한건 없을 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걸
밀려오는 그 숨결보다 포근한 건 없을 걸

(김세환 노래 / <사랑하는 마음> 가사)

아무튼, 시와 제대로 ‘연애’ 한번 해보자고 작심하면서 ‘연애’라는 말에 스스로 계면쩍어 속으로 까르륵~ 웃으며 강연장에 들어섰다.

A 시인의 ‘시적인 것을 만나는 순간’이란 첫 강의에 이어, B 시인이 ‘그대도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주제로 두 번째 강의를 했다.

교육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지만, 익히 알고 있는 것을 학습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B 시인은 상상력과 경험, 구체적인 묘사를 강조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에서 ‘쟁반’을 벗어 날 때 비로소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달’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청중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쟁반’이 ‘접시’로 바뀌기만 해도 발전이 있다며 독려를 하는데 나는 ‘달’을 떠올리니 자꾸만 갑순이가 생각난다. 시인은 “드라마를 그만 보셔야겠네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저 달을 보며 울었다는 ‘갑순이와 갑돌이’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 했더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더래요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 없이 울었더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안 그런 척 했더래요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더래요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 보고 울었더래요
갑돌이 마음은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고까짓것 했더래요

(김세레나 노래 / <갑순이와 갑돌이> 가사 일부)

달 보고 운 것은 갑순이가 아니라 갑돌이였나 보다. 갑돌이가 달을 보면서 울었다니 더 처량하다. 단언컨대, 갑돌이 장가간 날 갑순이도 틀림없이 같은 달을 보면서 눈물지었을 것이다. 다른 소재를 제시했더라도 시적인 감성이 더 고무되었을 리 만무하겠지만, 강사가 제시한 ‘달’은 내게 있어 갑순이의 눈물로 함축된 쓸쓸한 추억이다.

결혼 첫해 추석 명절에 시댁에서 처음으로 전도 부치고 나물도 씻으면서 준비를 하는데 그해 유난히 보름달이 밝고 환했었다. 마당 한쪽에서 감나무에 걸린 보름달을 보면서 친정 생각이 났던 것은 딸의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첫 추석 명절에 우물가에서 달 보고 울었다는 시어머님 또한 누군가의 딸이었기에 친정 생각이 간절했으리라.

대학 졸업 후 서울 생활 8개월 동안, 한강 둔치에 앉아 둥근 달을 바라보며 앞으로 내 인생이 어찌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뇌하던 순간마다, 어쩌면 그렇게도 기가 막히게 둥근 달이 하늘에 걸쳐있던지…. 달이 ‘웃고 있다.’는 느낌보다 ‘쓸쓸하게 내려다본다.’ 는 교감이 더 많았다.

▲ '서울의 달'이 수록된 김건모 'Be Like' 앨범

오늘 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텅 빈 방안에 누워 이 생각 저런 생각에
기나긴 한숨 담배연기 또 하루가 지나고
하나 되는 게 없고 사랑도 떠나 가 버리고
술잔에 비친 저 하늘에 달과
한잔 주거니 받거니 이 밤이 가는구나

(김건모 노래 / <서울의 달> 가사 중)

강의 도중, 다른 수강생들이 달에 대해 더 멋진 표현을 생각해 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그날, B 시인이 내 마음에 달 하나를 점 찍게 한 이후, 달은 그렇게 갑순이가 되었다가 갑돌이도 되었고, 갓 시집온 열여덟 새색시가 되어 우물가에도 뜨고 감나무 가지에도 걸렸으며 한강에서도 솟아오르기를 여러 차례, 이윽고 가슴에서 달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시적인 것은 한 생각도 진전이 없고, 달은 여전히 갑순이 눈물 속에 걸쳐 있으니 아무래도 시인되기는 그른 듯하다.

그런데도 다음 시간에는 어떤 내용으로 시와 연애하라고 독려할지 기다려진다. 아무래도 화려한 봄날에 ‘연애’에 낚였나 보다.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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