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연주하는 오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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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십여 년 전, 인도와 네팔의 불교 성지를 취재하러 출장을 갔을 때 네팔의 현지 가이드가 한 말이 충격이었다. 한국에 가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모으고 있다는 그는 “한국에 가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흔한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을 텐데 바다라니…. 전주에서는 자동차로 30여 분 만 달려 나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다이지만, 인도와 티베트,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와 접해있는 네팔은 내륙국가로 바다가 없다. 네팔의 눈 맑은 청년이 ‘한국의 바다’를 언급하기 전까지, 부끄럽게도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기야 네팔의 포카라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우람하게 펼쳐진 안나푸르나의 만년설을 보면서 눈물 나게 감동했던 것을 떠올리니 우리가 에베레스트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네팔 청년이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네팔 청년이 바다에 가고 싶다는 간절함을 피력한 이후부터 나의 바다를 대하는 자세가 다소 달라졌다. 그 후부터 바다는 자동차로 30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네팔 사람들이 간절하고도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경이롭고 환상적이며 신성한 바다’로 다가온 것이다.

지친 어깰 돌아서 내려오는 달빛을 본다
별빛같은 네온이 깊은 밤을 깨워보지만
죽음보다 더 깊은 젊은 날은 눈을 감은채
돌아 누웠지 숨을 죽이며 울고있었지
천년 같은 하루가 내모든 걸 빼앗아가고
한숨 속에 살다가 사라지는 나를 보았지
나는 내가 누군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어
나를 데려가 할 수 있다면 너의 곁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내려줘
나는 내가 사는 곳에 가진 않을래
돌아오는 길은 너무 멀지만
더 이상은 나를 버리고 살 순 없어
떠나자 지중해로 잠든 너의 꿈을 모두 깨워봐
나와 함께 가는 거야 늦지는 않았어
가보자 지중해로 늦었으면 어때
내 손을 잡아봐
후회 없이 우리 다시 사는 거야

(박상민 노래 / <지중해> 가사 일부)

최근에,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만나고 왔다. 아드리아 해 동부에 있는 크로아티아는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로 빠르게 부상한 나라다.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를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인데,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스플리트, 두브로니크 등이 관광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자다르(Zadar)라고 하는 크지 않은 항구도시에서였다.

자다르! 어쩐지 남해 몽돌이 자르르, 자르르 굴러다니는 듯하다. 그래서 자갈이 많은 곳이 아닐까 했는데, 그곳에 세계 최초의 바다 오르간이 있단다. 바다 오르간이라고 하니 문득 미국 출신 영화배우 ‘홀리 헌터’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긴 영화 <피아노>의 포스터가 떠오른다. 바다와 인적 없는 모래 위 그리고 파도치는 해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피아노 한 대! 그 묵시적인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했던가. 바다와 피아노를 떠오르게 하는 강력한 이미지가 각인되어 ‘바다 오르간’에 대한 상상력은 더는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바다 오르간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그곳을 향했다.

정작 그 바다에는 오르간이 없었다. 악기를 닮은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이면 뭔가 소리가 있었다. 먼 동굴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내면에서의 깊은 울림 같은 그런 소리였다. 돌고래들이 교감을 나누는 음향 같기도 하고 아무 의식 없이 내뱉는 무심한 파도 소리 같기도 하며, 뱃고동 소리 같기도 하고, 유서 깊은 성당의 오르간 소리 같기도 한, 그런데 신기하게도 각각의 음이 모여서 완벽한 연주를 하고 있다. 그 신비롭고 황홀한 소리의 향연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조화롭고 완벽하다. 충격이었다.

바다 오르간은 니콜라 바시츠(Nikola Basic)라는 크로아티아의 천재적인 설치예술가가 2005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유럽 공공장소 설치예술상을 받은 만큼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바다 오르간이라는 이 신비로운 조형물은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지름이 다른 오르간 파이프를 75m 길이에 걸쳐 수직으로 박아 만들었다고 한다. 파도가 철썩거릴 때마다 바람이 드나들며 35개의 오르간 파이프를 통해 각기 다른 음이 흘러나온다.

조형물이 설치된 계단에 앉아 바다 오르간의 연주를 듣노라면 처음엔 신비롭고 황홀하며 오래 머물수록 자연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연주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결과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파도의 조류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소리가 연주된다. 거친 날에 웅장한 음악을, 잔잔한 날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태어난다. 무엇보다 바다 오르간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성실한 연주자는 일출과 일몰, 밤마다 다른 무대를 선보이며 입장료나 관람료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연주한다. 이 얼마나 큰 공덕인가.

지나간 자욱 위에 또다시 밀려오며
가녀린 숨결로서 목놓아 울부짖는
내작은 소망처럼 머리를 헤쳐풀고
포말로 부서지며 자꾸만 밀려오나
자꾸만 밀려가는 그 물결은 썰물
동여매는 가슴속을 풀어
뒹굴며 노래해 뒹굴며 노래해
부딪혀 노래해 부딪혀 노래해
가슴속으로 밀려와 비었던 가슴속을 채우려 하네 채우려 하네
밀려오는 그 파도 소리에 밤잠을 깨우고 돌아 누웠나
못다한 꿈을 다시 피우려 다시 올 파도와 같이 될꺼나

(썰물 노래 /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가사 일부)

바다 오르간 계단에 앉아 헐리우드 감독 ‘앨프레드 히치콕’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라고 극찬했다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부터 품고 온 모든 고민과 걱정, 고뇌와 내면의 아픔이 오르간 소리에 사르르 녹아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아드리아 해 물 맑은 바닷물에 물감처럼 스르르 풀어진다. 그렇게 한동안 바다 오르간 연주에 심취해 있다가 나처럼 오랫동안 연주를 듣고 있는 한 가족을 보았다. 전형적인 슬라브족의 우람한 형체를 지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딸로 보이는 소녀가 부모 사이에 앉아 아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옆에는 두 아들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가족의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이들은 자다르의 바다 오르간과 석양을 배경으로 오래오래 그 풍광을 음미하고 있었다. 바다를 사랑하고 음악을 아끼는 가족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우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아가야만 해요.
해 뜨고 해가져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살아가는 세상이 이제는 슬퍼서는 안돼요
조금 더 늦기 전에 뒤돌아 가족의 손잡아요
언제나 내가 힘들 때 마다 날 위해 기도해준 가족
길 잃고 방황할 때마다 끝까지 나를 지켰죠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기다리던 가족
내가 사는 동안에 가족을 사랑해요.

(김종환 노래 / <가족을 위한 노래> 가사중)

바다를 연주하는 오르간의 풍경에는 아름다운 가족이 있어서 완벽했다. 자연이 주는 선물과 겸손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가족의 모습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는데 그 순간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아드리아 해와 파도가 연주하는 바다 오르간,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사람들은 완벽한 그림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바다는 음악을 만나고 사람은 바다를 만나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위로하고 치유하며 조화를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하였다.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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