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녹취록’과 KBS의 네 번의 굴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론] 김창룡 인제대 교수

불행한 ‘세월호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못해 코너에 몰렸던 박근혜 정부가 새롭게 나타난 녹취록 파문으로 또 다시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번에는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월호 관련 정부 비판 보도에 항의하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권력의 부당한 압력을 둘러싼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은 여야로 나뉘어 ‘권력의 부당한 방송자율성 침해’와 ‘홍보수석의 통상적 업무’로 공방을 펼치고 있다. 언론·시민단체들은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며 ‘국회 청문회 개최’를 압박하고 있다. 언론도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정작 1차적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KBS는 침묵 속에 일부 기자들이 성명서를 내고 있을 뿐이다.

녹취록 파문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까. 현재까지 드러난 내용을 종합해보면 KBS는 적어도 네 차례에 걸쳐 굴욕을 당해 공영방송의 위상과 신뢰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녹취록 사태가 보여주는 KBS의 네차례 굴욕 실상을 하나씩 살펴본다.

▲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현 KBS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징계무효확인소송 항소심 재판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PD저널

첫 번째는 정치 권력 앞에 드러난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의 굴욕이었다.

녹취록 전문에 드러난 두 사람의 대화에 커뮤니케이션 원리를 적용해 분석해보면, 김 전 국장은 이 전 수석을 향해 ‘선배’라고 호칭하면서 상하관계를 형성했다. 한국사회 특히 기자사회에서 호칭은 관계를 결정하고 그 관계는 대화내용을 결정한다. 이 전 수석은 세월호 관련 뉴스에서 ‘해경 비판 아이템’을 빼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무슨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질책했다. 선배의 질책에 김 전 국장은 ‘아니라’고 항변해보지만 이미 힘을 잃었다.

오히려 “이 선배, 솔직히 우리만큼 많이 도와준 데가 어디있습니까? 솔직히…”라며 그동안 알아서 보도자제, 비판자제를 해왔다고 자부하며 선배님을 달래는 모습이었다. KBS 보도국장의 위상이 이런 것이었던가? 자존심이 상한 KBS 후배 기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이렇게 울부짖었다.

“일개 임명직 공무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마음대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욕설까지 섞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울 수 있는, 그러면서 대통령도 봤다며 간교한 협박을 서슴지 않는, KBS의 위상이 딱 그 정도인가보다.”

두 번째는 KBS 사장과 보도국장이 연출하는 자중지란의 굴욕이다.

‘이정현 녹취록’이 폭로된 것은 2014년 김 전 국장이 길환영 당시 KBS 사장으로부터 사표 제출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 전 국장은 최근 법정 증언에서 “길 사장이 ‘대통령의 뜻이라 거절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보도국장 사퇴 과정에 대해 ‘청와대가 보도개입을 넘어 신분개입까지 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공영방송사 사장이 정치 외압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청와대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KBS 사장은 방송편성, 제작에 개입할 수 없다. 정치적 외압이나 유혹을 막아주는 최고경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을 내세워 나름 공정보도를 위해 노력하던 김 전 국장에게 사표를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김 전 국장은 최근 징계무효확인소송 항소심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기자회견하지 말라고 하면서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다, 사표 내라 3개월 동안 있으라’, ‘대통령 뜻이니 거절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요구했다. 전날 세월호 유가족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자회견 하도록 결정하고 임원회의에서 추인까지 한 사안을 기자회견 35분을 남기고 사표를 제출할 이유가 전혀 없다.”

김 전 국장은 자신의 갑작스런 사표 이면에 청와대 정무수석이 KBS 사장에게 전화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 청와대의 외압에 KBS 사장과 국장의 대립, 갈등은 결국 법정다툼으로 비화됐다. 정치권력에 힘을 합쳐 대응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대통령을 앞세워 해임 통보를 한 사장의 굴욕, 보도국장의 굴욕은 KBS를 관치방송으로 전락시켰다.

▲ 언론노조 등이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4월 21일과 30일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현 새누리당 의원)과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의 통화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언론노조

세 번째는 지금도 보도해야 할 뉴스를 보도하지 못하는 KBS의 현재진행형 굴욕 모습이다.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청와대의 공영방송 흔들기 사건이 내밀한 녹취록을 통해 공개됐고 대부분 언론이 크게 보도했지만 정작 KBS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현실적 굴욕이다. KBS의 사장, 국장 등 경영진이 직접 연루된 사건으로 그 피해자 격인 KBS가 이 소식을 시청자에게 자세하게 보도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닌 현재의 문제다. 시청자들은 왜 진실을 항상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뀐 후 뒤늦게 접해야 하는가.

이 전 수석이 해경 비판을 나중에 하도록 요구한 것은 진실을 훼손하는 부당한 행위다. KBS가 청와대의 방송자율권 훼손 행위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시청자를 두려워한다면, 진실을 지향한다면, 내부 구성원들이 보도 대신 ‘성명서’나 발표하도록 보도 통제를 가해서는 안된다. 녹취록에서 KBS 과거의 굴욕이 드러났다면 이를 보도하지 못하는 KBS 경영진은 현재의 굴욕을 미래로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KBS는 피해자이면서 항변도 법적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비굴한 모습이다.

현대 사회에서 공영방송은 막강한 영향력과 파급력을 갖는 공기(公器)라는 점에서, 또한 외압의 영향을 받을 위험성에 대비하여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방송법 제4조 2항,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제목 하에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하여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청와대 홍보수석, 정무수석 등이 방송제작 편성의 자율성을 훼손했다는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녹취록이 나왔다. 심지어 인사에까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온만큼 그 진실을 알아내야 할 당사자이자 피해자는 바로 KBS다. 그런데 보도조차 하지않는 현실은 시청자에 대한 배신이다. 실체적 진실을 위해서 자체 진상조사가 우선이지만, 최후로 법적 보호막에 의지하는 것은 법치사회의 권리다. 공영방송의 굴욕은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