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개돼지라 욕하는 모욕의 체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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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개돼지라 욕하는 모욕의 체제에 대한 단상
[시론] 전규찬 한예종 교수·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6.07.20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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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욕보인 자는 목이 잘렸다. 너와 나를 개돼지라 비아냥대던 작자가 다름 아닌 여론의 시세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됐다. 우리를 능멸한 자에 대한 사회적 징벌이었다. 모욕의 마땅한 대가다. 그렇다고 안심하지는 마시라. 새삼스러운 일처럼 경악하지도 마시라. 참을 수 없는 게 어찌 이 뿐이랴. 민중에 대한 멸시는 오래된다. 인민을 차별하는 우월적이고 이분법적이며 폭력적인 시선은 권력의 욕망에 도취한 자들의 자연스러운 시선이다. 인간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현 야수적 권력세계의 보편적 정서일 뿐이다.

개돼지는 신자유주의 체제 권력자들의 입을 통해 언제든지 발화 가능한 언어다. 밀폐된 회의 석상에서, 대취한 술 자리에서, 혹은 호화로운 거실에서 킬킬대고 손가락질하며 속삭인다. ‘이젠 개나 소나 다…’ 아흐, 저들이 내뱉는 조롱과 경멸의 언어를 당신은 진정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노동하는 대중을 상종못할 종자로 혐오하고, 죽어가는 프리케리아트(Precariat) 잉여 빈민을 불가촉 천민인 양 천대하며, 저항하는 일반 시민을 종북좌파라 매도하는 지배자들은 사실상 그 공직자와 은밀히 공의해 온 게 아닌가?

이미 오래전부터 상하 수직의 두 세계로 짝 쪼개진 공화국이다. 말을 삼간다고 다수의 인구가 짐승 신분으로 추락한 비참의 설계가 가려지지 않는다. 주변 온 데서 민중은 짐승으로 전락했다. 민중/짐승의 일체화. 참담한 현실지경이다. 저 고위 공무원의 발언은 이 구조화된 세계와 그 내부 특권화된 일부 세력의 공통된 아비투스(Habitus·특정한 사회 환경에 의해서 형성되는 습관), 일상화된 망탈리테(Mentalites·집단 무의식)를 투명하게 반사할 따름이다. 일개 공무원의 일탈적 언사로 간주할 수 없다. 파면이 마땅한 징벌이지만, 우리의 분노가 개인 징계의 수준에 멈춰서는 안 된다.

▲ ‘민중은 개·돼지’ 막말 논란을 일으킨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19일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원회로부터 파면당했다. 사진은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나향욱 기획관이 출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뉴스1

이 세계에는 민중을 없이 여기는 우월한 의식의 계급이 엄연히 존재한다. 저들의 속셈을 모른 척 할 텐가? 스스로를 고결하게 여기며 그 외의 타자를 개나 소 정도로 여기는 게 이들의 적확한 행태이지 않은가? 반도체 산업 재해 노동자를 대하는 삼성의 오만한 작태가 그 증거다. 용산참사의 현장이 그 실례다. 사드 배치에 항의하는 군민들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괴담을 쫒아 무조건 반대하고 나선다며 비아냥거릴 때, 그 바닥에는 민중을 천시하는 속내가 칙칙하게 깔려있지 않은가?

개념 속의 민중은 현실에서 짐승이다. 신분 처지가 그러하고 목숨 값이 또한 그렇다. 찍 소리 못한 채 이리저리 내몰리며,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굴욕적으로 따라야 한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모욕처분, 강제 처분이 버젓이 강제된다. 비명조차 없이,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유 없이 헬조선을 헤맨다. 비정하게 국가로부터 내쫓기면서, 그러면서 비굴한 생명을 유지해가는 짐승같은 숙명이다. 날벼락같은 일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마는 벌레의 시간을 현실의 다중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짐승의 삶은 그래서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민중총궐기 때를 돌아보라. 그때 모두가 여지없이 개돼지로 취급당하지 않았던가? 세월호 재난 현장을 벌써 잊었는가? 밀양과 강정, 그 외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농성현장과 투쟁현장은 또 어떠했나? 재개발 철거, 젠트리피케이션(개발로 임대료가 올라 원래의 주민이 쫓겨나는 현상) 현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목도하는 것도 개돼지로 전락한 존재들의 울음이고 슬픔이며 분노이지 않은가? 개돼지처럼 진압되고, 개돼지처럼 추방당한다. 개돼지처럼 참극으로 멸종하며, 사후에는 개돼지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전국 각지의 공장과 지하철 공사장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농장에서, 수도 없는 사람들이 개돼지보다 못한 짐승의 시간을 연명한다. 날파리 같은 벌레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그러다가 가끔은 그 어떤 인간적인 애도 혹은 동정조차 받지 못한 채 형체도 없이 썩어 문드러진다. 서울역 앞 무수한 쪽방촌에서 금방 목도할 현실이니 괜히 놀라는 척은 마시라. 그런 곳의 삶을, 말했듯, 권력(자들)은 개돼지 바라보듯 할 것이며, 그곳에서의 비참을 우리 또한 개나 고양이의 안위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게 맞지 않은가?

이 인간사회의 파경을 수치스러워해야 한다. 개인에 대한 규탄을 넘어, 이 체제의 모욕/모독의 체질에 더욱 분노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개돼지로 전락시키는 탐욕의 체제를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귀족과 천민으로 양분하면서 후자의 비참을 방기하고 조롱하는 반생명적 권력체제에 대한 인간 선언이 필요하다. 자본국가지배의 시대 양위할 수 없는 바닥 삶, 보통 삶, 벌레-인간, 인간-짐승들의 권리선언이다. 공화제 평등윤리를 위반하는 귀족제 인종주의의 철폐, 짐승으로 전락한 민중이 인간 자격을 되찾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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