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내 망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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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EBS ‘내 여친은 지식인’ 이대경 PD

하늘이 꾸물꾸물하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일주일 넘게 잘못된 비 예보를 반복했던 기상청이 드디어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타이밍이다. 내 배도 작게 꾸륵꾸륵 소리를 낸다. <내 여친은 지식인> 마지막 회를 완성하던 즈음부터 갑자기 배탈이 났다. ‘아직 이 정도는 내 몸의 자연 치유력으로 이겨낼 수 있어’라며 며칠 똥고집을 부리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지사제를 복용했다.

꾸륵꾸륵. 그 전보다 소리가 조금 작아진 것 같다. 역시 약이 좋다. 지사제 알갱이들이 내 몸 속을 돌아다니며 괄약근을 틀어막고 내 사회적 존엄성을 수호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뭔가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꾸물꾸물하다. 한 번 시원하게 비가 쏟아져야 기상청 직원들도 미소를 지을 텐데. 왠지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가 내가 지사제를 먹고 틀어막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서 기상청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정도면 망상도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아서 정신을 좀 차리려는데 문자가 온다. ‘내 여친은 지식인 3화 - 심의 승인’. 꾸륵꾸륵. 어쩌면, 단순한 망상이 아닐지도.

▲ 7월 14일 EBS <내 여친은 지식인-뭐가 진짜, 뭐가 가짜?> ⓒEBS

그렇다. 사실 <내 여친은 지식인>은 망상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남자 주인공 문하는 어려운 얘기를 들을 때면 곧잘 딴 생각에 빠진다. 인문학 스터디 ‘지하철’의 멤버들도 보통 학생들의 현실과는 떨어져 있는 세계에 흥미를 느끼고 살짝 이쪽으로 건너와 있다. 그리고 애초에 <내 여친은 지식인> 이라는 제목을 내 입에서 처음 뱉었을 때도 내 머릿속은 인문학과 연애담을 결합해 보겠다는 정말 나이브한 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때 떠올렸던 망상은 3부작 파일럿 프로그램이 되어있다. 아니다, 처음 했던 말을 조금 수정해야 겠다. <내 여친은 지식인>은 망상이 현실로 변해가는 과정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뇌내 망상의 현실화 – 문하의 세계에서

개인적으로 난 인문학이 망상의 일종이라고 본다. 사람과 삶과 세계에 대해서 분석하고 정리해보겠다는 발상은 이성의 영역보다는 그 반대의 영역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발상에서 시작해 수많은 이성적인 과정을 거쳐서 엄밀성을 가진 학문이 되는 거지만 말이다. 

그런데 난 그런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의, 인문학의 그런 면들이 좋았다. 그래서 스터디 ‘지하철’을 프로그램 안에 그런 식으로 배치했다. 좀 더 쉽게, 좀 더 재미있게 해야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과 불안들을 끝까지 누르고 그냥 인문학에 관한 얘기들을 정면으로 풀어서 담았다. 그렇게 해볼만 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대신 캐릭터와 공간, 색채, 연기톤을 내가 처음 인문학을 접했을 때 느꼈던, 그 현실과 다른 것 같은 분위기에 맞춰 구성하려고 했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스터디 부분이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많이 줬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인문학의 얘기들이 현실이 아니라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로 연출됐다는 것이니까.

▲ 7월 28일 EBS <내 여친은 지식인-진정한 사랑이 자라나는 곳은?> ⓒEBS

인문학 스터디가 그렇게 정리 됐기 때문에 문하와 채영이 등장하는 연애담 부분은 정확히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나갔다. 연기도 촬영도 색채도 최대한 생활연기에 가깝게. 프로그램에 존재하는 연애와 인문학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마치 ‘망상 vs 현실’ 같은 아주 다른 느낌으로 구성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구도 안에서 유일하게 양쪽에 걸쳐 있는 주인공 문하를 통해 어떻게 인문학과 현실이 접점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럴듯한 말로 꾸미지 말고 단순하게 말해보자. ‘문하는 스터디에서 다양한 얘기들을 듣고 생각해 본 뒤 채영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바로 이 한 문장이 <내 여친은 지식인>의 연출의도이자 주제이자 결론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문하의 세계에서 망상(인문학)은 현실에 영향을 끼쳤다.

뇌내 망상의 현실화 – 나의 세계에서

<내 여친은 지식인>이란 단어가 활자화되고, 내용이 문서화되어 결재라인을 넘나들면서 온갖 얘기들이 들려왔다. ‘뭐하는 프로그램이냐’, ‘드라마냐 다큐냐’, ‘B급으로 할거지?’, ’재미있게 해 재미있게’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회사(교육방송!)에서 연애드라마를 한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워했다. 난 우리 회사라고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나만 가지고 있던 생각이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은 늘 이렇게 나와 세상사이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게 한다.

▲ 7월 21일 EBS <내 여친은 지식인-둘 사이의 거리> ⓒEBS

그리고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늘 가졌던 큰 의문 - ‘무엇이 교육 프로그램인가’를 다시 한 번 곱씹게 했다. 나는 교육 혹은 EBS란 단어가 프로그램에 관해서 아무 것도 규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와 상반되는 현실적인 인식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다른 회사의 다른 PD들이라고 뭐 딱히 다를까, 하는 지점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나도, 다른 PD들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편하게 각자의 뇌내 망상들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훨씬 더 재미있지 않을까?

더불어 나와 함께 <내 여친을 지식인>을 만들었던 촬영팀, 조명팀, 세트, 미술, 배우들까지 모두의 얼굴이 떠오른다.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내 말들 앞에서 당황한 그 얼굴들. 내 망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솔직히 인정한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친절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 더 애썼더라면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완전 연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제작기를 쓰면서 돌아보니 타다 남은 찌꺼기가 여전히 너무 많다. 아, 갈 길이 너무 멀다. 내 앞가림이나 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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