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사랑방, 공동체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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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사랑방, 공동체라디오
[특별기고-김승월 SIGNIS Asia 이사] 인도네시아 공동체 라디오 BBM-FM을 방문하다
  • 김승월 전 MBC PD(SIGNIS Asia 이사)
  • 승인 2016.08.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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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초라했다. 집으로 치자면 판잣집 수준. 인도네시아의 한 공동체라디오를 찾았을 때, 그 아담한 단층 건물 구석에 자리한 한 평짜리 스튜디오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스튜디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작고 낡은 콘솔. 고물상에서나 볼 법한 낡은 의자, 벽에 걸린 장식조차 초라했다. 게다가 그 소박한 스튜디오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데서 무슨 방송이 나간단 말인가?

한국의 공동체 라디오(COMMUNITY RADIO)는 단 일곱 곳 뿐이다. 공동체 라디오가 겪는 많은 어려움을 들었기에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다. 그러다 SIGNIS Asia(아시아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공동체 라디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명과 단절된, 정글지대, 또는 숨어사는 난민들의 부락에서는 신문이나 TV, 인터넷은 꿈도 못 꾼다. 단파라디오나 공동체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바깥소식이나 생활 정보를 들으며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고 한다. 마침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Yogyakarta)에서 시그니스아시아 주최로 라디오 세미나와 워크샵이 열렸고, 그곳에 발표자로 참가하면서, 공동체 방송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됐다.

▲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북부에 위치한 마노마르따니(Minomartani)의 공동체라디오 BBM-FM 방송 ⓒ김승월

다민족·다언어·다종교의 사람들, 공동체라디오로 소통

족제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중심부에 있다.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꼽히는 보로부도르(Borobudur)가 있는 이곳은 자바 원주민 문화가 뿌리 내린 곳이다. 족자카르타 북부에 마노마르따니(Minomartani)라는 인구 100여 명의 작은 부락이 있다. 작은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선 이 지역은 20여 년 전만해도 농촌지역이었고, 지금은 도시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중 하층 수준의 마을이다. 이 마을 중심에 공동체 라디오 BBM-FM이 있다. 세미나 참석자 30여명이 견학 온다는 소식에 젊은 대학생들이 안내 봉사를 하러 왔다.

두타(Duta) 의과대학 2학년 생인 아유(Ayu) 양이 반갑게 맞아준다. 대학과 마을이 협약을 맺었단다 매주 월요일 30분 동안 주민들에게 건전한 성문화, 에이즈, 마약에 대한 계몽 프로그램을 한단다.

▲ 공동체라디오 BBM-FM 방송에 자원봉사를 위해 방문한 대학생 아유 씨 ⓒ김승월

영어가 유창하고 의상이 화려해서, “부모님이 부자신가? 부자니까 이런 가난한 마을을 이해하기 위해 봉사하려 왔냐?”고 물었다. 아유 양이 웃으면 답했다. 아빠는 발리에서 프리랜서 드라이버로 일하고 있다고 말이다.

봉사자 학생들을 따라 방송국 바로 앞에 있는 마을 문화홀에 들어섰다.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 4배쯤 되는 큼직한 홀이다. 전면에는 바나나 나무로 만든 무대가 있고, 후면으로는 전통악기 합주단이 자리 잡고 있다. 연주자 해설자 모두 마을 주민이다. 오늘은 리허설, 매주 월요일 마을 주민을 위해 여기서 공연을 한다.

연극 코디네이터인 꾼초로(Kuncoro) 씨, 그는 여기 공동체 라디오의 부매니저다. 낮에는 다른 라디오 방송사에서 일하고 밤에 여기 와서 방송도 하고 공연도 이끌어 준다. 그에게 왜 이런 공연을 하냐고 물었다. “이 연극은 이 마을에서 시작한 자바 고유의 연극입니다 자바의 전통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합니다. 이 연극은 자바 언어로 합니다.”

오늘 공연은 사슴이 등장하는 자바의 전통 그림자 연극 와양깐칠(Wayangkanchil).버팔로와 악어가 길에서 만났다. 나무에 깔린 악어를 버팔로가 구해주고, 그 보답으로 악어는 버팔로를 등에 태워 강을 건네준다. 강을 건넌 뒤, 둘이 서로 다투게 되자, 지혜로운 사슴이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라며 타이른다는 이야기다.

무슬림인 꾼초로 씨가 말을 이었다. “공동체 라디오는 우리 이웃들을 사이 좋게 지내기 위해서 하는 방송입니다. 무슬림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은 첫째 가는 형제입니다.” 이곳은 마을 주민 80% 이상이 무슬림이다. 가톨릭, 기독교, 힌두교 신자들은 소수다.

▲ BBM-FM 공동체 라디오의 부매니저 꾼초로 씨 ⓒ김승월

인도네시아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타 종교에 대한 너그러움이다. 인도네시아는 3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300여 종족이 살고 있으니, 언어도 그만큼 다양하다. 다양한 문화를 지키는 작업 중 하나가 바로 공동체 라디오. 수라바야(Surabaya) 라디오 CEO, 에롤(Errol) 씨가 인도네시아 공동체 라디오 역사를 소개한다.

“1980년대 후반,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민주화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때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공동체라디오 운동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Inter-News, 유럽의 Fifa Foundation, 유네스코 등에서 자본과 기술을 지원해주었습니다. 한 때는 수천 개의 공동체 라디오가 생겨났다가, 대부분 반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두들 경험과 지식이 너무 부족했죠.”

1988년, 이 마을에 공동체 라디오가 탄생했다. 스위스 출신 예수회 신부 호프만 (Ruedi Hofmann) 씨가 이 마을 공동체 라디오 설립을 도왔다. 호프만 신부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되어 인도네시아 인들을 위한 미디어 교육에 젊음을 바쳤다. 그가 세운 미디어 센터 ‘푸스캇’(Puskat)에서는 지금도 영상 오디오 교육을 하고 있다. 라디오 세미나도 이 곳에서 열렸다. 지금은 그 뒤를 이스와라하디(Iswarahadi)신부가 이어받아 공동체라디오 봉사자들에게 제작 기법을 가르치며 자문해주고 있다. 출연자 제작진은 거의 모두 마을주민, 노동자, 농민, 교사, 상인 들이다. 인구 200여 만의 족자카르타 지방에는 지금 10여 개의 공동체 라디오가 있다.

▲ 주민들을 상대로 공동체라디오 제작 등 미디어 교육을 맡고 있는 이스와라하디(Iswarahadi) 신부 ⓒ김승월

공연 감상을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도 훌륭한 방송

재정 문제는 공동체라디오의 가장 힘든 부분의 하나다. 인도네시아는 민주화 운동 이후, 방송법으로 국영방송과 사영방송, 공동체방송만을 할 수 있다. 공동체방송은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독립된 방송이다. 해서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단 한푼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 광고도 할 수 없다. 오직 주민들과 후원단체의 후원금만으로 운영된다.

이곳 공동체 방송은 주민 공동체 문화와 고유 전통문화, 고유 지방언어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문화홀에서 여러 가지 전통공연을 하며, 전통극의 기량을 전수 해주기도 한다. 이 지방 술탄이나 국회의원이 방문했을 때는, 주민과의 대화를 생중계 하였고, 대학과 협업을 하여 주민들을 깨우쳐 주기도 한다. 어려움은, 일을 이어갈 젊은 봉사자 구하기가 힘들고, 낡디 낡은 장비를 교체하는데 드는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

이 마을 공동체라디오 출력은 50와트(W). 반경 2.5 킬로미터(㎞)에 머무는 사람들 대상으로 방송한다. 방송시간은 매일 오후 6시부터 밤 12시까지. 자바의 민속음악 주민들의 이야기를 주로 방송한다. 말없는 사람들의 목소리(voice of the voiceless)를 전한단다. 도시 노동자, 베칵(Becak)이라 불리는 3발 자전거 운전사, 그리고 실직자들도 생각과 의견을 공동체라디오를 통해서 들려준다.

▲ 수라바야(Surabaya) 라디오 CEO, 에롤(Errol) 씨(왼쪽)와 김승월 SIGNIS Asia 이사 ⓒ김승월

청취자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특별한 조사를 한적이 없으니 정학한 숫자는 모른단다. 다만 가청 범위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이 마을 사람 100명을 포함하여 천여 명 정도. 많이 듣는다고 쳐도 단 몇 백 명 듣기도 힘들 듯하다. 그렇다면 청취자 반응은 있냐고 다시 물었다. 전화나 인터넷 반응이 있냐고 더 물었다. 꾼초로 씨가 천천히 답했다. “반응 있지요, 어떨 때는 주민들이 방송 듣다가 직접 방송국을 찾아와요.”

리허설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가 구경한 소감을 차례로 들려주었다. 꾼초로 씨를 따라 방송국으로 갔다. 스튜디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방송되는 거냐고 물었다. 지금 저 공연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단다. 그러면서 콘솔을 이리저리 만지고 선 연결을 점검했다. 그제야 마을사람들이 공연 소감을 이야기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렸다.

단 몇 초의 블랭크에도 기겁하며 신경 곤두세워 만드는 방송은 아니다. 인기인 출연자와 정교한 제작으로 수 많은 청취자를 사로잡는 그런 방송은 더욱 아니다. 우리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이웃들의 생각과 문화를 편하게 나누는 조금 큰 사랑방이다 라디오 방송이 그렇게 소박하게 다가설 수 있음을 공동체 라디오 BBM-FM 이 보여주었다.

▲ 공동체라디오 BBM-FM 방송 문화홀에선 여러 전통공연 등이 열린다. 전통악단의 연주자와 해설자 모두가 마을 주민이다. ⓒ김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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