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限韩令)’이라는 이름의 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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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중국= 류종훈 KBS PD

북경에 온 지 한 달하고도 보름 남짓. 중국어 공부라도 할 요량으로 습관적으로 중국 포탈인 바이두를 본다. 실시간 인기검색어도 있고, 주욱 훑어 내려가면서 지금 중국에 이런 일이 있구나를 대략이라도 짐작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간혹 한국 관련 뉴스가 눈에 띄면 중국인의 시선은 어떤가 싶었고, 한동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이런저런 기사들이 많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자주 보였다. ‘한한령(限韩令)’, 한류를 제한 한다는 의미 정도로 번역하면 될까? 한류로 일컬어지는 한국 연예인, 콘텐츠 전반에 대한 압박을 의미하는 말이다.

시작은 7월말로 기억된다. 홍콩의 매체들이 사드로 인해 중국 내 한류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그 즈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그럴듯한 내용들도 유포됐다. 주로 중국 소재 한국법인의 정보 보고라는 형식을 띄고, 상당히 구체적인 연예인들의 명단과 프로그램 이름들이 돌았다. 광전총국에서 각 성의 방송국에 유선으로 지시를 내렸다더라, 이미 허가가 난 프로그램은 한국 연예인들의 출연 분량을 편집하고 있다더라, 추진하던 계약들은 백지화하고 관망 한다더라, 주로 이런 내용들이었다.

곧이어 한국 언론들이 관련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연예인들의 중국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일방 취소된 사례들이 기사화됐다. 사드 배치로 인한 갈등의 불똥이 한류로 튀었다는 분석과 함께 SM 엔터테인먼트와 YG 엔터테인먼트의 주가가 연일 폭락했다. 급기야 중국 최대 SNS 인 웨이보에 한한령 블랙리스트까지 등장했다. 이종석, 유인나, 박민영, 구혜선 등 한국 연예인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53편과 한류 스타 42명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었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연예인들은 9월 1일부터 중국 활동이 제한될 것이라는 내용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 8월 7일 중국 <시나닷컴>의 한한령(限韩令) 기사에선 8월 4일자 <서울경제> 보도를 인용하고 있다. ⓒ화면캡처

바이두에서 ‘한한령’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제목의 기사들도 이때부터 제법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보도들이 주로 한국 언론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韩娱圈或将有1/3的人失业”(한국 문화산업 종사자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있어 찾아봤더니 한국인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주가의 폭락도, 한한령을 둘러싼 널뛰기도 대부분 한국발 인용이거나 한국인들의 생각을 옮긴 것이었다. 심지어 바이두에 ‘한한령’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서울경제>에서 8월 4일자로 보도한 단어로 소개하고 있다.

‘한한령’은 실재하나

팩트(사실)가 궁금했다. 중국과 한국의 기사들을 비교해가면서 검색해봤다. 우선 확실한 것은 정부 차원의 공식 지침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주지하다시피 언론과 문화 산업에 대한 통제가 존재하는 나라다. 호텔에 투숙하면 정부의 지침에 의해 구글과 페이스북, 유튜브, <뉴욕타임스>와 <블룸버그>는 접속이 안 된다는 안내문이 친절하게 적혀 있는 나라다. 그런 만큼 만약 한한령이 실재한다면 확실한 근거는 중국 광전총국의 공식 지침이나 언급일 텐데, 찾을 수 없었다. 한류에 관심이 많은 박사 과정 중국인에게 묻자 정부의 공식 지침은 “关于~”(~에 대하여)로 시작하는 형식으로 발표되는데 ‘한한령’이라는 말은 이상하다며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지 되물었다. 중국 매체들도 공히 “文件(문건)은 없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 비공식적인, 각 성의 위성방송국에 대한 구두 지시 같은 건 있었을까? 하지만 이 역시 신뢰할만한 취재원이 인용되거나 공개된 것은 찾지 못했다. 사설 정보지 수준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중국 매체들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제 사례가 있는가의 문제다. 한국 기사들에 따르면 엑소(EXO)의 상해 콘서트는 사전승인을 받지 못해 무산됐다. 김우빈과 수지의 팬 사인회 역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연기됐다. 북경에서 외주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는 중국인에게 물었다. 계약 한 건이 보류됐다고 했다. 한국 관련 일은 당분간 지켜보자는 정서가 있다고 했다. 중국 예능 프로그램 제작 협의차 입국한 촬영 스태프도 원래 모든 촬영을 한국 팀이 하기로 했었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한숨을 쉬었다.

▲ 지난 4월 9일 중국 북경 광선미디어 주최로 열린 '제16회 음악풍운방 연도 시상식'에서 아이돌 그룹 EXO의 무대를 팬들이 촬영하고 있다. ⓒ화면캡처

동시에 과장이라는 반박도 많았다. 유인나가 중국 드라마에서 하차했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소속사에서는 사실무근 이라고 밝혔다. 상황은 혼재돼 있고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의 감은 중요하다. 이런 사례들이 한한령 때문인지는 뚜렷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업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분위기가 실재했다. 한국인뿐일까?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노련한 촉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더듬으며 일단 멈춰서 있었다.

의심과 두려움, 그렇다. 이것이 현재 한한령의 큰 몸집이다. 이미 많은 PD들은 경험한 바 있다. 권력이 바뀌던 몇 년 전, 방송가는 블랙리스트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정권에 비판적이라고 찍힌 몇몇 연예인들의 이름이 돌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 명단이 존재하는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하지만 괴담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입에서 입을 타고 번지면서 스스로 사실이 되어 간다. 윤도현이 하차했고 김제동을 볼 수 없게 됐다. MC를 오래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변화를 주기 위해 등등의 이유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저 높은 곳의 누가 무슨 지시를 했는지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현업 PD들조차 혐의를 가지고 보기 시작했고, ‘누구누구를 섭외해도 괜찮을까’라는 자기 검열에 한 번쯤 빠져야 했다. 유령과 싸우는 것 같다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몹시 닯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질적으로 사드 배치는 안보의 문제다. 우리의 안보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안보이기도 하다. 고도의 정치력과 외교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다만 이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중국이 언제든 정치적인 갈등을 이유로 한류를 제한할 수 있고 그러면 우리의 밥그릇이 깨질 수 있다는 의심과 두려움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중국과의 갈등은 피해야 한다는 유령에 또 많은 PD들이 시달릴지도 모른다.

▲ 배우 박보검이 지난 4월 9일 중국 북경 광선미디어 주최로 열린 '제16회 음악풍운방 연도 시상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화면캡처

최근 2~3일 사이 우려가 과도하다는 기사들도 나오고 있다. 이준기의 새 영화는 개봉 첫날 관객수 동원 1위에 올랐고 그가 가는 곳마다 중국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 한한령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상황은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지켜봐야 할 문제다. 비단 지금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미 수년전부터 중국은 자국의 문화산업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런저런 규제를 노골적으로 꺼내들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역시 스크린 쿼터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절대명제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단순히 사드 하나로만 풀기에는 변수가 너무도 많은 어려운 방정식이 바로 한한령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며칠간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한류가 중국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그 취약함을 고백해 버렸다. 그 고백을 받은 누군가가 뒤에서 슬며시 짓고 있을 미소가 그저 불편하기만 하다.

‘한한령’과 ‘혐한’ 사이…한류의 현 주소는 어디일까

그래도 이 소동 속에서 눈 여겨 봐야 할 지점은 분명 있다. 막연하게 유통되는 한한령 밑바닥에 흐르는 중국인들의 온도다. 소비자들의 시선. 그들 역시 한한령이 있는지 무척 궁금해 했고 갑론을박 떠들어댔다. 그런데 최근 중국인들은 몇몇 한국 연예인들에게 실제로 분노하고 있다. 만리장성을 소재로 삼은 박보검의 광고가 그랬고, 중국 지도를 배경으로 하면서 하이난과 타이완을 빼먹은 지석진이 한동안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런 상황들을 한한령과 한데 묶으며 ‘거봐라’ 하는 식의 기사도 있었다. 한한령이 위로부터의 제재라면 이들의 혐한은 밑으로부터 제재일 텐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지난달 난사군도(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에서 보았듯, 이들의 애국주의는 때로는 섬뜩할 정도다. 관이 주도한다고 색안경을 끼고 볼 수만은 없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생글거리며 중국어를 가르치던 교사에게 한 외국학생이 남사군도를 언급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中國一点都不能少”(중국은 한 점도 작아질 수 없다–난사군도가 중국의 영토임을 표현하는 말)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 박보검이 출연한 케이스위스 광고. 중국 언론에선 이 광고에서 ‘만리장성’이란 이름을 가진 중국이 바둑에서 패한데 이어 여자 댄서에게 뺨을 맞는 장면 등이 나온다며 박보검이 중국을 모욕하는 광고를 찍었다고 전했다. 논란이 커지자 지난 10일 케이스위스 차이나 측은 공식 웨이보에 “광고는 2015년 방송된 <응답하라 1988>(tvN)의 한 장면을 따온 것으로, 정치적인 문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해명과 함께 사과를 전했다. ⓒ화면캡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사는 한 여학생은 박보검을 좋아했는데 싫어졌다고 하면서 “讨厌”이란 표현을 썼다. 꼴 보기 싫다, 얄밉다는 뜻이다. 자기들이 좋아해주고, 벌어가는 돈이 얼마인데 중국을 모욕할 수 있냐는 말도 했다. 그러고는 “国家面前无偶像”(의역하면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뜻) 라는 말을 또박또박 알려줬다. 슈퍼주니어 팬클럽 이름을 위챗 아이디로 쓰고 있는 학생이었다.

무서웠다. 광전총국의 한한령 논란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점은 이런 정서와 흐름이다. 우리 오빠들에게 열광하는 그들의 속내. 이번을 계기로 그동안 한류가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가를 한 번쯤 돌아보게 된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다시금 한한령이 화제가 된다면, 한국 오빠들을 과연 누가 지켜줄까에 대한 답을 찾는 것부터가 한한령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일 듯하다.

*류종훈 KBS PD는 현재 중국 정법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수(2016~2017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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