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여름을 버티는 기자들에게
상태바
이 미친 여름을 버티는 기자들에게
[김범수 PD의 그러거나 말거나]
  • 김범수 KBS PD
  • 승인 2016.08.17 10: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독히 더운 날씨다. 서른여덟 평생에 이렇게 더운 여름이 있었나 싶다. 원래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인데도 올 여름은 견디기가 쉽지 않다. 사실 방송하는 사람들이 더위나 추위에 강한 편이다. 방송 일정에 쫓기고 제작비 압박에 시달리다보면 아주 추운 날이나 혹독하게 더운 날에도 촬영을 해야 할 일이 부지기수다. 덕분에 혹한이나 혹서에 대한 경험이 많고 그걸 잘 견디는 요령도 많이 알고 있는 게 이 동네 사람들이다. 하지만 올 여름 더위는 그 경험이나 요령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래도 가끔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는 나는 사치스러운 인생이다. 동거차도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세월호 인양 과정을 기록 감시하는 희생자 가족들, 난데없이 사드 폭탄을 맞아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나선 성주 주민들,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용서를 강요당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 그분들에게 이 여름 유난한 더위는 얼마나 가혹할 것인가! 물론 그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KBS 안에도 이 미친 여름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기자들이다.

▲ 지난 7월 21일 언론노조 KBS본부 주최로 서울 여의도 KBS 신관 광장에서 사드 보도지침 규탄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어언론노조

안 그래도 더운 올 여름, 기자들의 삶을 더욱 열 받게 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고대영 사장이다. 고대영 사장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 보도기획팀장, 보도국장, 보도본부장을 지내며 KBS 뉴스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3~4년 전부터는 사장이 선임이 있을 때마다 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PD 출신인 길환영 전 사장, 조대현 전 사장 시절에도 ‘보도본부 인사는 고대영 라인이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다. 물론 소문이야 과장된 것이겠지만 고대영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수정권 8년 동안 KBS 보도국을 대표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고대영 사장이 지난해 11월 KBS 사장 후보로 나섰을 때 가장 반대한 건 다름 아닌 기자들이었다. 당시 사내에선 ‘기자들은 PD출신 조대현 사장의 연임을 지지하고 PD들은 고대영 기자가 연임을 막아주길 원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 그만큼 고대영 사장은 후배 기자들 사이에서 기피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2009년 KBS 기자협회가 실시한 보도국장 신임투표에서 93.5%의 기록적인 불신임을 받았고, 보도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12년 노조의 신임투표에서는 84.4%의 불신임률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침내 사장으로 선임되자 많은 기자들이 KBS 보도국의 퇴행을 우려했다.

그리고 2016년 여름, 그 우려는 현실이 됐다. 기자의 외부 기고문과 해설위원의 논평을 문제 삼아 보복성 발령을 내고, 사드 관련 일방 취재 지시를 비판한 전국기자협회와 사장의 뉴스 개입성 발언을 비판한 노조에 대해서는 감사를 실시하겠다고 예고했다. 최근에는 문화부 기자 두 명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이유가 회사가 투자한 영화에 대한 취재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란다.

논란을 새로운 논란으로 덮는다고 했던가! 회사 생활 9년 하면서 이토록 황당한 징계와 감사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본 적이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 KBS에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지만 이렇게까지 몰염치한 것은 처음이다. 그야말로 미친 여름이다.

▲ 지난 7월 21일 언론노조 KBS본부 주최로 서울 여의도 KBS 신관 광장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2014년 세월호 침몰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현 새누리당 대표의 KBS 보도통제 논란을 당사자인 KBS에서 보도하지 않는 상황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후 지역으로 인사 발령이 난 정연욱 기자가 발언을 하고 있다. ⓒ언론노조

나는 KBS 뉴스를 보지 않는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뉴스를 보고 있자면 내가 KBS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쁜 놈과 한 편을 먹은 아주 불편한 기분이 든다. PD인 내가 이 정도일진데 KBS 기자들은 어떻겠는가? 아마 불편함을 넘어 처참함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저널리즘의 가치를 고민하는 기자일수록, KBS를 사랑하는 기자일수록 그 처참함이 더 클 것이다.

“KBS 뉴스를 만드는 기자들이 정신 건강에 나쁘다며 KBS 뉴스를 외면하는, 자기 분열적인 일상이 계속됐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존재와 의식이 유리된 자기 분열적 일상을 그만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예전처럼 다시, 제가 만드는 뉴스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KBS를 떠나는 이유입니다.” - 심인보 기자(2014년 퇴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중

좋아했던 한 기자 선배가 <뉴스타파>로 떠나며 사내게시판에 남긴 글이다. 아마 그 선배처럼 수백 명의 KBS 기자들이 ‘자신이 만든 뉴스를 사랑할 수 없는 분열적 일상’에 지금 이 순간에도 병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 고통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외부에 기고를 하고, 회사 게시판에 성명서도 쓰고, 부당한 취재 지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 발버둥조차 징계와 감사로 막겠다고 하니 이 비극을 도대체 어찌하란 말이냐!

이정현 녹취록에 대해 ‘본질은 KBS 9시 뉴스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보도본부의 간부들 밑에서 미친 여름을 버티고 있을 KBS 기자 선후배님들, 부디 힘내시길 바란다. 가을이 오면 더위가 물러나는 것처럼 조금만 더 버티면 다시 KBS 뉴스를 사랑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미약하고 미약한 무지렁이 PD가 도움이 될 만한 힘은 없지만, 그 미친 여름이, 그 미친 더위가, 그 미친 땡볕이 너무 강할 때, 기꺼이 같이 맞으리라. 이 마음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퇴사한 그 선배의 글로 마무리 한다.

“제가 가려는 길은 KBS와 비교하면 어쩌면 아주 작은 오솔길, 걷다 보면 길의 흔적조차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길이지만 그래도 힘차게 뚜벅 뚜벅, 길을 만들면서 걸어가려 합니다. 그 길을 걷다보면 이 어둠의 시절을 뚫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랑하는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만날 거라고 믿습니다. KBS에서 만들었던 가장 가슴 뜨거웠던 기억,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동질적인 목표 의식을 가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어깨를 걸고 싸웠던 기억은 그때까지도 분명 유효할 것입니다.” - 심인보 기자, 위와 같은 글 중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