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쉼’, 그 시간이 바로 영감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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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EBS 스페셜 프로젝트 ’리얼타임 영감의 순간’

쉬고 싶었다. 누군가 나에게 ‘쉬어도 된다’고 해줬으면 했다.

당연히 머리로는 안다. 내가 며칠 일을 안 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회사도 문제없이 돌아간다는 걸. 그래도 왜 이렇게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여유롭기가 어려운 건지. 내 직업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프로그램 끝나면 ‘번 아웃(Burn Out)’ 증상이 생겨서 녹초가 되고, 미처 회복이 되기 전에 또 새로운 프로그램을 마주하게 된다.

새롭게 마주한 프로그램은 ‘EBS 스페셜 프로젝트’였다. 프로그램의 목표는 ‘세상에 없던 포맷’이었다. 참 무책임한 목표라고 실소가 지어지면서도 두근두근 설레는 목표이기도 했다. 두 달여의 기획 기간 동안 TV를 유심히 관찰했다. TV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와 같았다. 빠르게 돌아가고, 여유가 없고, 자극적이다. 방송국에 입사하기 한참 전부터, ‘다매체 시대에 TV프로그램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논의했는데,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TV는 똑같다.

▲ 8월 4일 EBS <리얼타임-영감의 순간> 박칼린 ⓒEBS

TV가 시청자를 사로잡는 방법은 소위 ‘센 거’로 압축된다. 내용이 세거나, 영상이 세거나. 그리고 그런 것들이 빠르게 스쳐간다. 방송국에서 처음 편집을 할 때 어떤 선배는 ‘한 컷이 3초를 넘으면 지루하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바쁘디 바쁜 TV에 약간의 틈을 내보고 싶었다. TV도 쉬게 해보자. 지친 마음을 설레는 프로그램으로 달래며, 한 번 외쳐보고 싶었다. “여러분, 쉬어도 돼요! 아니, 쉬는 게 더 좋대요.”

<REALTIME(리얼타임)-영감의 순간>은 촬영한 영상을 편집 없이 내보내겠다는 콘셉트다. 어떤 사람의 ‘일상의 조각’을 편집 없이 10여분 동안 롱테이크(한 숏의 길이를 매우 길게 하여 촬영하는 방법)로 보여준다. 그렇게 촬영 내내 롱테이크에 아주 집착적으로 고집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드라마나 예능처럼 상황이 통제되는 것도 아닌, 다큐멘터리에서 10분을 롱테이크로 찍는다는 게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똥고집을 부린 건, 편집을 한 지점이라도 하면 그 사이에 무수한 시간적, 공간적 재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롱테이크를 보는 것은 시청자와 출연자가 거짓 없이 온전히 그 시간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시간을 편집하지 않음에서 오는 ‘현장감’이 좋았다. 내가 그 공간에 함께 들어있고, 그와 함께 숨 쉬고 있는 느낌말이다.

이 기획을 회사에 보고했을 때, 사실 다들 당혹감을 표현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다. 센 프로그램들이 포진한 황금 시간대(목요일 저녁 9시 50분)에 일상을 그냥 편집 없이 찍겠다니, 반대가 많을 만도 했다. 그래도 반대한 분들만큼 많은 분들이 뜨겁게 지지해줘서 다행히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도 논란이 돼서 이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프로그램인가 생각이 들 때쯤, 의외로 용기를 준 건 출연자들이었다. 특히 섭외 초반에 박칼린 감독과의 만남이 프로그램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프로그램의 취지와 콘셉트를 설명하니, 박칼린 감독은 “나는 매일 아침마다 마당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을 꼭 갖는데, 그게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이에요. 이런 시간의 필요성을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시간을 편집 없이 10분 정도 찍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박 감독은 “진짜 편집 없이 방송 할 거면 출연할게요. 한국에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답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의 만세를 외쳤다.

이후 프로그램의 취지에 동의하고 섭외에 응해주신 다른 출연자들(베르나르 베르베르, 김윤아, 박찬호, 금난새, 데니스 홍, 정목, 윤호섭, 르 클레지오, 마틴 프로스트) 도 프로그램 자체가 더 견고해지는데 도움을 줬다.

사실 처음 기획 할 때의 제목은 <REALTIME 쉬다>였다. 그런데 10인의 출연자를 취재 한 후, 제목을 <REALTIME 영감의 순간>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의 휴식이 보고 싶었다. 이들을 취재하는 중에 알아낸 사실은, 이들의 휴식은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대단한 놀이’를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휴식’의 의미가 ‘일하는 것과 완전히 분리된 어떤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일상 중 어떤 작은 ‘순간’에 가까웠다.

▲ 8월 11일 EBS <리얼타임-영감의 순간> 정목스님 ⓒEBS

이러한 순간을 이들은 리츄얼(Ritual·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리츄얼이 그들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바로 ‘멍-’이라는 말이다. 다들 ‘멍 때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울 때, 진정한 휴식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취재하면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게 머리를 비울 때, 진정한 창의력이 나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서 인생의 영감이 솟아난다는 게 가장 흥미로웠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을 증명해서 기뻤다. 잘 쉬어야 창의적이다. 온 세상이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떠들고 있는 이 시기에, 매일 창조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비결은 바로 ‘잘 쉬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PD라는 직업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일에서의 성장이 나의 성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나는 PD로서도 많은 성장을 했지만, 한 인간으로서도 많은 것을 깨닫고 치유받았다. 쉬어야 한다는 것에 더 이상 집착적인 갈증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다. 다만 ‘나만의 순간’을 만들어서 꾸준히 실천하기로 했다.

▲ 8월 4일 EBS <리얼타임-영감의 순간> 김윤아 ⓒEBS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항상 두근두근 설레며 제작했고, 만들어 지기만 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2부까지 방송이 나간 이 시점에서(방송은 총 50분짜리 3부작이다.) 사람들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나에게 묻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프로그램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예상하지 않았다. 출연자들도 ‘한국에서는 환영받기 힘든 콘셉트’라고 이야기 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다들 즐겁게 임해 주었다.)

당연히 동의한다. 다만, 사람들이 ‘아, 뭔가 새로운 것이다’라고 인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자기만의 리츄얼’을 갖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면 작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반응은 SNS와 커뮤니티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고, TV에 어느 정도 틈을 만들어 놓은 것에 기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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