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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지난 8월은 멀리 브라질의 리우 데 자이네루에서 열린 제31회 올림픽을 지켜보느라 희비가 엇갈린 나날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심장이 쪼그라드는지, 팽팽한 긴장감과 숨 막히는 승패의 시간을 인내할 수 없고 즐길 수 없어서 비교적 승리 확률이 높은 경기만 골라 보게 된다. 자고 일어나서 승전보가 기다리고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었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힘을 겨루어 당당히 메달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느니 그만큼 국민들의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물론, 개인적으로 “메달이 뭐가 중하간디~ 경기를 즐기는 그 자체가 소중한 거지”라고 하면서 스포츠 정신에 근거한 의의를 새롭게 하려 하지만, 매번 앞서가는 언론의 호들갑에 휘둘리고 마는 나약한 미디어 수용자의 신분일 때가 많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올림픽 경기 시청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 때부터였다. 가정에 TV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다행히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내내 올림픽 경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루마니아 체조 요정 코마네치였다. 키 153㎝, 몸무게 39㎏으로 열네 살의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는 루마니아 국기를 형상화한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서 이단 평행봉과 평균대에서 7번이나 10점 만점의 완벽한 경기를 펼치며 일약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신기에 가까운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 출전 선수들이 해방 후 첫 금메달의 감격을 전해왔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여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TV를 보던 가족들과 이웃들이 펑펑 울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유도와 레슬링에서 동메달이 나왔고 여자 배구팀도 구기 종목 사상 첫 메달인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스포츠의 다양한 매력을 알지 못한 초등학생에게는 오직 눈이 예쁜 코마네치의 멋진 경기만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저 소녀
호수 같은 커다란 눈동자에 내 마음 담고 싶어라 (중략)
춤추는 작은 소녀 사랑을 해봤을까
춤추는 작은 소녀 사랑은 즐거워요
내 마음의 슬펐던 이야기는 모두 다 떠나버렸네
나비처럼 춤추는 소녀를 사랑하고 싶어라
춤추는 작은 소녀 예뻐요 예뻐요
춤추는 작은 소녀 멋져요 멋져요
춤추는 작은 소녀 예뻐요 예뻐요
춤추는 작은 소녀 멋져요 멋져요

(문성재 노래 / <춤추는 작은 소녀 > 가사 중)

1980년 하계 올림픽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64개국이 출전을 거부하거나 개인 자격의 선수만 파견해서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보이콧으로 불참했는데 그해 대한민국은 광주 민중 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으니 하계 올림픽은 염두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 담장 넘어 세상 이야기는 가려진 게 많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암흑기가 많았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막내 이모 카세트에서는 온종일 조용필 테이프가 A면에서 B면으로, B면에서 A 면으로 되풀이되었고, 라디오에서도 조용필의 노래가 일색이었다.

다시는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자고
그렇게 애타던 말 한 마디 못하고
잊어야 잊어야만 될 사랑이기에
깨끗이 묻어버린 내 청춘이건만
그래도 못 잊어 나 홀로 불러보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조용필 노래 /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가사)

1984년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고향인 남원에서 LA 올림픽을 관전하며 여름방학을 보내던 내게 대학신문사 선배 편집국장으로부터 급한 취재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원광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국가대표 신준섭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여 학교에서도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신준섭 선수가 귀국하여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에 있다고 하니, 직접 만나서 취재하라는 명령이었다.

체육과 선배를 수소문하여 주소하나 달랑 들고, 신준섭 선수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대중교통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당시 선배에게 부탁해서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 신준섭 선수의 인터뷰 도입 부분이 ‘터덜 덜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달렸는데, 그나마 신준섭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취재진이 몰려오자 군에서 급히 길을 넓힌 것이 이 상태라고 했다. 지금은 찾아갈 수도 없는 아주 외진 시골이었다.

해밝은 길을 삐거덕 삐거덕 달구지가 흔들려 가네
털거덕 털거덕 삐거덕 삐거덕 흔들흔들 흔들려 가네
주름진 얼굴 무슨생각 뻐끔 뻐끔 뻐끔 담뱃대 물고
털거덕 털거덕 삐거덕 삐거덕 흔들흔들 흔들려 가네
이길을 곧장 가면 꼬불꼬불 고갯길
그 마을에 복스러운 며느릿감이 있다던데
해밝은 길을 삐거덕 삐거덕 달구지가 흔들려 가네
털거덕 털거덕 삐거덕 삐거덕 흔들흔들 흔들려 가네
흔들 ~~ 흔들려가네

(정종숙 노래 / <달구지> 가사 중)

대학 신문사 기자활동을 하면서 그때처럼 보람을 느낀 적도 드물었다. 취재는 신속했고, 신선했고 선배들의 평가도 좋았다. “짜식~ 제법 하는군” 이런 눈빛으로 보상을 받았다.

1988년 제24회 하계 올림픽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개최되었는데 역대 최다 국가인 159개국에서 8,391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성공리에 치러졌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와 MBC는 공동으로 올림픽 노래를 공개적으로 모집했고 TV 시청자 투표를 통해 길옥윤 작곡 김연자 노래 ‘아침의 나라에서’가 선정됐다.

모두가 다정한 친구처럼 모두가 다정한 형제처럼
우리의 가슴이 열리는 곳 오~ 서울코리아
사랑이 넘치는 거리에서 바람이 시원한 강변에서
인류의 꿈들이 피어난다 오~ 서울코리아
저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깃발은
세계가 하나로 뭉쳐지는 평화의 손길
모이자 모이자 아침의 나라에서
모이자 모이자 우리 함께 달리자

(김연자 노래 / <아침의 나라에서> 가사 일부)

88올림픽을 3개월여 앞두고 최종 결정단계에서 조직위원회는 홍보와 보급을 이유로 외국 음반사 폴리그램과 계약, 곡은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가 쓰고 노래는 폴리그램 전속 가수인 코리아나가 부르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88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바로 '손에 손 잡고'이다. ‘아침의 나라’에서도 정겹지만, 개막식 공연에서 선보인 코리아나의 ‘'Hand in hand'가 무게감 있게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한창일 때, 어떤 선배가 “대한민국에서 마라톤 금메달이나 땄으면 좋겠다.”고 했다. 올림픽이 어떤 대회인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에서 한국이 금을 딴다고? 나는 믿을 수 없었지만, 황영조 선수는 1992년 8월 9일 몬주익 언덕을 넘어 1등으로 올림픽 스타디움 결승선을 통과했다. 모든 경기는 아름답지만, 마라톤 금메달은 감동 그 이상이었다. 몇 년 전, 스페인 여행을 갔다가 몬주익 언덕에서 황영조 선수의 기념석상을 보게 되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은, 유감스럽게도 육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전북출신 배드민턴 국가대표 박주봉, 김동문 선수의 활약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2000년 호주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은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처음 치러졌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30대 노장 투혼을 발휘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신화, 여자 핸드볼이 전 국민을 울렸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한국의 박태환 선수가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우승하며 국민에게 큰 기쁨을 안겨줬다. 역도 장미란 선수의 금메달이 고마웠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은 금 13, 은 8, 동 7개의 성적으로 5위를 차지해서 역대 올림픽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체조에서 양학선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 오랜 감동으로 남아있고, 펜싱의 선전이 눈부셨다. 축구는 올림픽 출전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올림픽 무대에 나선 장미란은 마지막 시기를 실패한 후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밝은 미소를 보여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바벨에게 손 키스를 남기며 런던 올림픽 역도경기장을 떠났다. 무사히 마쳐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그래, 스포츠란 이런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마저 어루만지며 경기장을 떠났던 장미란 선수는 뒤늦게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당시 동메달리스트였던 흐리프시메 쿠르슈다(아르메니아)의 소변과 혈액에서 금지약물 성분이 검출됨에 따라 쿠르슈다의 메달 박탈이 확정되면 장미란이 동메달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소식이다. 하기야, 장미란 선수의 아름다운 미소는 우리를 이미 메달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스포츠 정신에 대한 경이로움을 선사한 장미란 선수의 미소는 역대 올림픽 경기를 관람한 이후 가장 큰 선물로 기억된다.

2016년 리우 올림픽 역시,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많은 감동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기쁨의 포효와 아쉬움의 탄식이 뒤섞였다. 많은 선수가 그 행복한 결말이나 또는 반대의 주인공으로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50대에 접어든 지금 메달의 색깔로 선수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사실 올림픽에는 승패가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박수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처음으로 올림픽 경기를 시청했던 1976년 LA 올림픽 이후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났고, 10번의 올림픽이 치러졌다. 2016년 8월 6일 오전 8시부터 시작된 리우 올림픽 개막식을 꼬박 지켜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나는 오래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1988년 9월 17일 오후 1시 10분, 전 세계인의 시선이 대한민국의 서울에 쏠린 그 순간, 텅 빈 운동장에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짙푸른 잔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가던 소년이다. 그 1분의 정적이 2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정적 뒤에 폭풍처럼 몰아치던 감동의 격랑 역시 잊을 수 없다.

나에게 있어 올림픽은, 코마네치도, 금메달도, 승리의 기쁨이나 패배의 아쉬운 탄식도 아니다. 철들 무렵부터 40년을 함께 해온 올림픽, 그것으로부터 배운 것은 정직함이다. 행운도 정직함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정직하게 웃을 수 있는 자, 그 사람이 최후의 승자다.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것 없어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만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혀 보는 거야
때론 큰 산 앞에서 무릎 끓고서 포기도 하려 했어
처음처럼 또다시 돌아가려고 무작정 찾으려 했어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 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혀 보는 거야 마이웨이~

(윤태규 노래 / <마이 웨이> 가사 중)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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