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는 누가 믿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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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누가 믿어주지
[제작기= 김승욱 KBS PD] KBS ‘추적 60분- 끝나지 않은 싸움’
  • 김승욱 KBS PD
  • 승인 2016.09.03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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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생활을 하면서 ‘습관’이 하나가 생겼다. 지난 13년 간 천천히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됐다. 바로 ‘출연자와의 연락 끊기’다. 일부러 끊는 건 아니다. 방송 후 감사의 전화를 나누고, 며칠이 지나면 새로운 업무로 자연스런 ‘디졸브’가 이뤄진다. 다시 출연자와 연락하거나 만나는 건 드문 일이다.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제는 이런 게 오히려 쿨하고 편하다. 만남이 많고, 헤어짐도 많은 우리네 PD들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예외적인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이 그랬다.

뒤바뀐 운전자, 그리고 목격자

지난 5월 초, 재심 사건을 방송했다. 우연히 목격한 교통사고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을 했다가 위증죄로 복역한 성기수 씨의 사연이었다. 자신은 운전을 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당사자를 위해 증언했고, 법원은 성기수 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일로 성 씨의 사업은 망했고, 가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10년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그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8월 24일 KBS <추적 60분-끝나지 않은 싸움> ⓒKBS

첫 만남

성기수 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 4월 초 따스한 봄날이었다. 아파트 정문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 그는 평범한 60대의 아저씨였다. 으레 제보자들이 그렇듯, 속사포처럼 빠른 말로 억울함을 얘기했다. 하나씩 사실을 확인하면서 몇 시간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날 목격한 사고를 정확히 보신 게 맞나요?”
“네, 제 눈으로 똑바로 봤습니다.”
“그렇다면 운전자와 동승자가 뒤바뀐 건가요?”
“네, 뒤바뀐 겁니다.”

사건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양측의 입장이 정확히 반대였고, 성 씨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13년간 다퉜던 법정 공방을 내가 무슨 재주로 뒤집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재심 사건 취재는 기존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제보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을 중심에 놓고 취재 하던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양쪽을 의심하고 검증해야만 했고, 상대방은 경찰과 119구급대원이었다. 경찰과 119구급대원의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명백한 논리에, 반박한 근거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성기수 씨를 믿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의심

취재하는 동안 그 ‘의심’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심지어 방송 당일까지도 그의 말을 의심했고, 결국 의문을 다 풀지도 못한 채로 방송을 해야만 했다. 결정적 제보자를 찾아내고, 과학적 실험으로 현장을 검증하고, 전문가들의 의견까지 더해졌지만 ‘혹시 내가 틀린 건 아닐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존재했다. 다행히 방송 후 좋은 반응이 있었고, 성기수 씨는 내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그렇게 4개월이 흘렀다. 어느 날 그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결정적 증거물이 나왔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당시 사고자를 구조했던 119구급대원과 상황실의 교신내용이 담긴 테이프가 13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테이프 복원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많은 서류가 요구됐고, 복원 업체 선정은 까다로웠다. 모두가 지쳐갈 즈음, 복원이 완료되었다. 방송 이틀 전, 급한 연락을 받고 복원 업체에 도착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 진실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 8월 24일 KBS <추적 60분-끝나지 않은 싸움> ⓒKBS

허탈함 그리고 시원함

결과는 ‘복원 실패’였다. 미처 예상 못했다. 밀려오는 실망감과 허탈함. 성기수 씨는 용기를 잃지 않겠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그 억울한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아직 남아있던 그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테이프 복원을 앞두고 봤던 성기수 씨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과 공개 직전,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분명 진실을 기다리는 자의 표정이었다. “사람을 쫓을 것인가? 진실을 좇을 것인가?” 나는 진실을 좇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 결국은 사람이구나

선배들에게 매주 같은 말을 듣는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대화다.

“요새 무슨 프로그램 하지?”
“추적60분요.”
“고생한다.”

사람은 바뀌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다. ‘나보다 네가 더 고생 하는구나’ 라는 연민과 응원의 메시지일 것이다.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이제 시사 제작팀은 ‘기피대상 1호’다. 취재 환경은 녹록지 않아졌고, 보호할 인권과 지켜야 할 법 위에서 매일 줄타기 하는 심정으로 취재를 한다. “PD하면 즐겁지 않나요?”라는 질문은 시사 PD에게는 금기사항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 지난 수년 간 거쳐 온 시사제작팀에서 빛나는 성과를 낸 적도 딱히 즐거웠던 적도 없었지만, 아직은 이 팀을 나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힘이 남아 있나보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건 현장에서 만나는 성기수 씨 같은 ‘진실 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 일이 밥벌이 수단을 넘어 소명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우리를 믿는 그들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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