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로드 단식현장의 자멸신호를 읽으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론] 전규찬 한예종 교수·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놀라운 일이다. 엽기다. 가히 기행이며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틀림없는 비정상의 현상, 명백히 비상한 현실이다. 그런 줄 알았지만, 그전부터 그랬던 일이지만, 현행의 작태는 우리의 이해 폭을 넘어선다. 상식이 감당 못하는 자살 이야기다. 자살 공화국임에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버린, 더 이상 제어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자살극이 펼쳐지고 있다. 경향 각지를 무대로 하는 자멸의 드라마다. 바로 어제는 유명 야구 해설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지 않는가. 이것은 더 이상 소동이 아니다.

자멸의 예외상태. 물론, 우리가 유의할 타살, 사회적 타살, 사고사들도 끊이지 않는다. 세월호를 빼놓더라도, 전국 각지 여러 공장, 다양한 사업체, 온갖 ‘건설 현장’에서 연이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뚝뚝 아래로 떨어지고, 컥컥 짓눌려 쓰러진다. 재벌 반도체 공장의 ‘산업재해’로부터 병을 얻고 결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사라진 여공들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모두가 저임금 착취, 불안전 고용, 미비한 노동의 조건이 빚어낸 결과로 빛나는 삶을 안타깝게 잃고 허망하게 마감하고 만 이들이다.

정치적 무관심, 경제적 무책임의 구조 하에서, 이들은 죽고 나서도 인간의 권리를, 명예를 되찾지 못한다. 오직 부주의한 안전사고의 희생자로, 그 흔한 ‘근로자’, 무수한 ‘인부’ 중 일부로 익명 처리될 따름이다. 이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그에 앞서 사고의 원인규명이 철저히 진행되었으며, 이후의 실질적 예방조처가 철저히 강구되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어보지 못한다. 이들 무명 잡인들에게 분노의 동정, 애도의 정동이 다가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외적인 일이다.

▲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티브로드지부 이영진지부장을 비롯하여 전주와 시흥광명의 해고조합원들이 지난 8월 31일 단식농성을 시작하며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연대노조

이들에 대한 자본/국가의 마땅한 정치적 책무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죽음 현실에 관해서도 시민/사회로서의 윤리적 부담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멸절해 가는 인간 존재들에 대한 사회적 응대의 책임이다. 구의역에서 죽음 맞은 그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에게 보인 비감과 분노, 애도의 정동을, 세월호에서 강남역으로 이어온 동정의 정치를, 이제 우리는 자멸하고 또 자진(自盡)하려는 이 땅의 소외된 자, 고립된 집단, 버려진 인간들에게도 보여야 한다. 사회적 자살자들에 대한 인간적 장례 절차다.

최근의 두 가지 일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후미진 산길 옆에서 탐욕의 재벌가문과 함께 한 영화의 시간을 스르르 마감한 롯데 부회장 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최근 정권과 첨예하게 한판 붙은 족벌신문 사장의 제수이자 수상한 스캔들에 얽힌 호텔사장의 부인이 어느 새벽 한강 다리에서 풀쩍 투신했다는 기사 탓도 아니다. 쇼킹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 인연 없는 이들에게 현격한 계급적 거리의 우리가 심심한 애도의 심정을 표하기는 어렵다. 죽음의 이유, 극단적 선택의 사정을 궁금해 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사연은 다르다. 자살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의 문제로 사유토록 만든다. 첫 번째는 얼마 전 안산 어떤 사무실에 모여 질소가스를 흡입하면서 조용히 삶을 마감해버린 네 명의 이야기다. 안타까움과 슬픔을 금치 못한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오싹한 두려움까지 느껴지는, 서늘한 공포로 다가오는 소식이다. 개돼지 취급 받는 우리의 눈과 귀로 다가오는 이런 뉴스에 으쓱한 한기를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가 경악하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녔음에 틀림없을 저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조용한 집단자멸, 밀폐된 동반자살의 회동. 그 최종적 만남의 시공간, 그 참담한 풍경을 (살아)남은 우리는 어찌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말했듯, 온갖 사정이 있었으리라. 이들의 비극적 선택을 몽땅 사회의 탓으로 미루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국가의 책임만을 과장하는 오류도 피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놀라운 빈도와 강도로 반복되는 이 참극을 우리는 이제 위험한 패턴으로 인식하는 게 맞지 않은가? 사회 붕괴의 위험신호로 간주하는 게 옳지 않나?

사회의 해체를 경고하는 비상한 예외상태에 주목하고, 그 위중함에 걸 맞는 대응을 국가권력체제에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자진의 사태는 현실의 절망에서 비롯되고 절망의 현실이 키운다. 그러하기에 헬조선이라는 절망의 현실을 초래한 국가권력체제가 사태를 책임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또한, 현실의 절망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소될 수 없는 것이기에, (집단)자살을 ‘사회적인 것’으로 접수하고 그 해결을 사회복구의 키로 설정하는 공론이 절실하다. 계속해 개인의 사적인 선택으로 미루면 큰일 난다.

사회가 파탄난다.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의 헬조선의 타락이다. 생명 구제를 포기한, 오직 직 허위의 환상 공동체로의 전락이다. 자살을 예방하는 국가의 노력과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자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자세만이 이 땅에, 이 공화국에, 이 헬 조선에 희망이 남아있음을 예증한다. 추가적인 주검을 예방한다. 그러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이들의 침묵에 귀 기울이면서, 동시에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거나 죽지 못해 산다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이런다는 사람들의 절규를 경청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두 번째 자살 이야기도 지금처럼 무시하면 안 된다. 죽음을 각오 하고 대권에 나선다는, ‘죽음’이라는 수사적으로 희화화시켜버리는 저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국회 앞에서 단식 중인 티브로드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며칠 전의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새로이 단식에 가담하는 한 해고자의 절규를 들어야 했다. 목숨을 걸고 나섰다. 죽을 각오로 곡기를 끊는다. 정권과 자본, 국회와 사회 그 어느 누가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는 원망이고 곡성이다. 자살의 경고문이다.

제발 살려 달라는, 함께 살자는 이들의 간곡한 호소를 무시하고 늘 그런 언설쯤으로 치부해버리는 비정이 결국 이들의 자멸을 초래한다. 저들의 비명에 등 돌린 국가와 사회 그리고 우리 뒤편에서 저들은 더 이상 절규하지도 않고 흐느끼지도 못한 채 조용히 삶의 희망을 놓는다. 자멸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이 땅이 비정한 헬 조선임을 고발한다. 오싹한 주검의 증표로서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자살공화국으로부터의 탈주 불가능성이라는 저주와 환멸, 허무와 냉소만을 더욱 유포한다. 틀림없이 가능한, 지극히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이런 지옥이 끔찍하고 두렵지 않은가? 이런 야수적인 꼬락서니를 어찌 미래로 가져갈 텐가? 사회의 존속이 가능하지 않다. 하기에, 우리는 자멸한 자와 죽으려는 인간들에 대한 국가와 자본, 체제의 책임을 다시 따져야 한다. 좌절하고 절망한 이들이 자살 회합을 갖고 자진 공동체를 찾는 그런 불행을 방기하는 체제를 용납하면 안 된다. 목숨 걸고 단식에 나선 국회 앞 티브로드 해고 노동자들에게 살 길 터주지 않는 자본을 당장 고발해야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 누가 감히 생존을 탐하나? 개돼지라도 그러하는 법이 절대로 없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