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건네는 다짜고짜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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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왕초와 용가리’ 이창준 감독

4년 동안 울고 웃었던 나의 첫 장편다큐멘터리 영화 <왕초와 용가리>가 8일 개봉했다. 개봉관 200개 이하로 출발하면 다양성 영화라고 하던데, 불과 12개로 출발하는 작은 영화다. 지금이야 뿌듯한 마음으로 제작 후기를 작성하고 있지만, 거참, 무슨 용기로 시작했을까. 아니, 어떻게 버텼을까. 아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왜 이걸 시작했을까’란 질문만 있었던 것 같다.

2012년 5월 2일 처음 영등포에 간 뒤 매일 출근하듯 그곳에 가고 두 달 뒤엔 방을 얻어 쪽방촌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경제적 압박과 의욕상실로 다시 그곳을 뛰쳐나와 -이미 빚으로 살던 놈이 카메라 장비 1500만 원까지 지르고 방송일도 접고- 7개월 가량을 영등포 근처에 얼씬도 안 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끌고 온 이유, 처음 내가 그곳을 찍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너스레는 그만 떨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 이야기는 내 뼈를 고아 만든 일명 ‘사골다큐’(프로듀서 한경수의 표현)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이고 청록색으로 빛나던 선지 덩어리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 흘리던 ‘추잡 중년 독립PD’의 솔직 제작기다. 편의상 이야기를 단락단락 나눠보기로 한다.

▲ 영등포 안동네 전경

서막: 명함을 빠꾸 맞다

2012년 5월 3일 처음 영등포에서 왕초 상현을 만났다. 취재고 뭐고 그곳에서 뭐든 하려면 외부인은 그의 허락을 받아야한다. ‘다큐멘터리 하는 누구누굽니다’라고 인사하며 명함을 꺼내자 그의 주머니에서 노란 고무줄로 묶은 명함 다발이 나왔다. KBS, MBC, SBS, ◯◯신문, △△일보 등등. 왕초 상현이 말했다. “나 명함 받아도 보관할 곳도 없어!” 

손 부끄럽게시리… 뭐 이런 경우가 있지? 전략을 바꿔야했다. 무슨 전략이냐고? 매일매일 가서 죽치기. 다음 날 또 갔다. 그냥 영등포 역전을 어슬렁거렸다. 그곳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다 안다. 낯선 이가 나타나면 서로 서로 감시한다. 상현이는 가끔 내가 기대있는 벽을 발로 차면서 “조심해요. 여기 길가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어. 기자고 뭐고 디지게(뒈지게) 맞고 도망간 사람 한둘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다음날에도 또 갔다. 매일 저녁 8시에 가서 11시까지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 명 두 명 사람들과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짤짤이 판이 벌어지면 꼈다. 술판이 벌어지면 옆에 앉아서 얘기만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오더니 대체 뭘 찍고 싶냐고, 궁금한 게 뭐냐고 물었다.

그날의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한다. 문고리를 열었다. 첫 전략이 먹힌 거다. 그 뒤로 그들과 악착같이 놀았다. 동전 던지기해도 이기려고 기를 쓰고 10년 만에 치는 당구에서도 어떻게든 이겨서 베푸는 척하고 밥 사주고. 싸움판이 벌어지거나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옆에 붙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태연한 척 다리에 힘 꽉 주고 꼿꼿이 서서- 그 동네 모든 상황에 일부가 되려고 노력했다. 굉장히 힘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녹초가 됐다. 그렇게 두 달 만에 상현에게 촬영 허가를 받았다.

▲ 이창준 감독과 왕초 상현(오른쪽)

1막: 누가 저 해를 확 따먹어 버려라

상현의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찍으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할지 감이 안 왔다. 상상도 못할 그 인생의 맛과 체취와 빤스 속에 감춰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찍고 싶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쪽방을 하나 얻었다. 같이 살아보자.

저녁 시간에만 가는 것과 같이 사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할 일이 없었다. 카메라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종일 동네 앞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어쩌다 상현이가 옆에 있을 때 잠시 카메라를 꺼내면 어디선가 욕지거리가 들린다. “뭐야, 씨X, 카메라 확 깨 뽀샤 벌라!” 

상현의 도움으로 하나둘씩 설득해 나갔다. 100명? 200명? 이제 좀 찍을만하다 싶으면 청송감호소에서 10년 살다 나온 사람이 등장하고, 또 어디서 새로운 진상들이 나타나고, 7월과 8월 더위는 기승을 부리고. 아, 이거 포기해야하나? 이 질서 속에 내가 어떻게 들어 가야하지? 여기서 두 번째 전략을 구사했다. 땡볕을 피하지 말고 해를 따 먹자.

내 생활부터 정돈했다. 밤이 더워 새벽 3시 혹은 4시에나 간신히 잠들고 오전 10시께 기상했다. 그리고 보란 듯 헬스 가방을 메고 근처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했다.(쪽방 샤워장은 끔찍하다.) 오후 시간엔 역전과 주변을 돌아다니며 인물과 상황들 파악하고, 저녁 무렵 사람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시간이면 카메라를 꺼내들고 상현이가 있든 없든 돌아다녔다.

물론 자주 시비가 붙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맞섰다. “당신 여기서 뭐해!”/ “나? 보면 몰라요? 당신이 싫으면 내가 안 찍을게”/ “술값이나 주쇼”/ “내가 왜? 나랑 친해요? 친해지면 내가 술 한 잔 살게요” (이 전략은 사진작가 조세현 씨가 알려준 팁이다.) 자칫 몸싸움으로 번질 상황도 여러 번 벌어졌다. 그러면 상현이 없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줬다. “이 사람 여기 살아요. 동네 사람이야.” 

나중에 상현이가 그런 얘기를 듣고 나한테 시비 걸었던 사람들한테 뭐라 한 모양이다. 헬스가방 메고 운동 가는데 100미터 전방에서 일전에 한판 붙었던 노숙인 패거리들이 전원 기립하며 나한테 아는 척한다. “진~즉 말하지. 상현이 친구라며?” 상현은 내가 취재하기 편하게 친구라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 

▲ 이창준 감독이 기거한 쪽방촌 숙소

2막: 악수(惡手)가 묘수(妙手)로

촬영을 시작한지 한 달 만인 8월에 EBS다큐멘터리 영화제 제작지원 피칭에 나갔다. 떨어졌다. 피칭을 개떡같이 했다. 피칭이 뭔지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른 채 30분을 떠들다가 진행요원에게 제지당했다. 그리고 9월, DMZ 다큐영화제에서 하는 ‘크로싱 보더스’라고 하는 국제 다큐멘터리 워크숍에 참여하고 또 피칭을 했다. 떨어졌다. 외국인 멘토들의 혹독한 비난을 영어로 들었다. “나 같으면 이거 펀딩 안 해”, “식상한 주제야, 내가 노숙인들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지?”, “가능성이 없어” 등등. 나는 대들었다. 영어로. “You know what? I gonna keep going anyway(당신이 뭘 알아? 어쨌든 난 계속 할 거야).”

그런데 그 당시 용가리 정선이가 간경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촬영을 계속하면 정선이의 죽음을 기다릴 것만 같았다. 더 찍을 수가 없었다. ‘난 되는 게 없어.’ 

결국 방을 빼고 집으로 갔다. 돈 버는 일에만 집중했다. 사무실도 내고 -개인사업자 특별융자 3000만 원으로- 본격적으로 방송사 외주 일을 따내려고 기를 썼다. 방송사에 있는 당숙과 술도 한잔하고, 모 부장님과 점심도 먹고, 사무실에 들러 ‘편집 장비랑 다 있지?’라고 했을 땐 ‘이제 뭐가 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쪽방촌이고 나발이고 이제 애들 학비도 벌고 -애가 셋, 큰 애가 3년 뒤 대학 들어간다- 정상적인 내 미래를 설계하고 싶었다. 그렇게 월세 100만원씩을 내고 경리 일을 맡기로 한 아내랑 둘이 함께 사무실을 지켰다. 7개월 동안 야속한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며.

그때 전주영화제 다큐멘터리 피칭 공고가 떴다. 그래! 나란 인간은 사장할 팔자는 아니야! 다시 영등포로 갔다. 쪽팔리기도 하고 민망했다. 그렇게 달라붙을 땐 언제고 몇 달을 쌩 까다가(모른 체 하다가) 찾아갔으니.  

▲ 용가리 정선(왼쪽)과 이창준 감독

다행히 용가리 정선은 술도 끊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형님 제가 가더라도 마지막 제 모습까지 담아주세요.” 헤벌쭉 정선이 웃었다. “그래, 그러자. 너 병 나아서 오래오래 살아, 임마!” 

오랜만에 안동네에 가니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똑같이 생긴 벤츠 두 대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총천연색 문신이 손등부터 어깨까지 올라온 놈부터 깍두기들이 몇 명 상현이와 얘기 중이었다. 무서웠다. 그 짓을 첨부터 다시 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안 났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할 짓은 아니다.

“창준 형님이시죠?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깍두기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건 뭐지? 한 놈, 두 놈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내게 꾸벅 인사를 한다. 내가 사라진 사이 나에 대한 소문과 전설이 영등포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던 거다. 노숙인 패거리들에게 “보면 몰라”라며 큰 소리 친 이야기, 예전에 운동하던 사람이고 말이 PD지 건달이라더라, 상현 형님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줬다더라(상현이 폭력사건에 휘말렸을 때 경찰서에 가서 CCTV를 확인하고 도와준 적이 있다) 등등. 바로 그 ‘창준 형님’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음하하하하!

3막:  왕초의 친구, ‘창준 형님’  

어디서 굴러먹다 온 ‘근본 없는 기자놈’에서 ‘창준 형님’으로 코스프레 하기 시작했다. 안동네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 나이도 돈도 필요 없다. 그들만의 질서 안에서 서열이 매겨진다. 한 번은 왕초와 노닥거리고 있는데 70살은 돼 보이는 노인네가 와서 신발을 벗고 무릎까지 구부리고 상현에게 반절을 하는 것이었다.(예전 예법인데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방에서 큰 절을 하듯 신발을 벗고 반절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왕초의 친구다. 전에는 왕초에게 말을 놔도 조심스러웠는데 이때부턴 말을 막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행동하고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처럼 생각했다. 아내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당신 이제 그 동네 사람 같아, 그러지마.” 미안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문을 활짝 열고 당당히 그 동네 안으로 들어갈 때가 된 거다.

점점 그 동네에 동화되고 있었다. 이제 처음 보는 사람이 오더라도 내가 신삥(신참) 취급했다. “어디 갔다 왔어요? 고생 하셨네. 방은 얻었고?” 노숙인들과도 만나면 멀리서부터 손 흔들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이제 술 좀 작작 먹어. 얼굴이 반쪽이 됐구먼”, “당신 이 카메라에 안 찍히면 후회할 걸, 다 찍었어, 사람들. 나중에 이 영화에 당신 얼굴만 안 나오면 서운할 걸” 

정말 그랬다. 서로 카메라에 찍히려고 나서는 바람에 오히려 당황하기도 했고 좀 더 신중하게 촬영을 해야 했다. 멍석을 내가 깔아야 건지는 게 있는데 질질 끌려 다닐까 걱정됐다. “왜 안 찍어요”/ “이거 찍어”/ “내가 술 먹고 얘랑 뽀뽀할 건데 찍어”(동성애자 노숙인 형님과 뇌성마비로 술잔도 혼자 못 드는 형님) 

오히려 촬영을 줄였다. 열흘정도 가면 한두 시간 카메라를 들었다. 말 그대로 ‘대박 상황’이 벌어져도 미동도 안하고 지켜만 봤다. 나의 카메라는 점점 숭배와 은총의 대상이 되었다.

▲ 영등포 안동네 촬영 현장

4막: 안동네, 허망한 바다를 떠돌다 지친 쪽배들의 선창

“이거 소재주의에 빠진 거 아닙니까?” 
“이상한 사람들 보여주면서 관음증 유발시키는 다큐 같은데?” 
“한 번 찾아봐요. 이전에 이런 작업한 감독들 많아요. 그림도 더 세요.”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신들이 다큐를 알아! 관음증이라고? 몰래 훔쳐보기 안하는 다큐가 어딨어! 내 영화는 다르다는 걸 몰라! 이 XXX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뭐라 당당하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덫에 걸린 쥐새끼 같이 느껴졌다.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나? 아무도 내 편이 없네.

기획안을 열 번은 쓴 거 같다. 쓸 때마다 콘셉트와 내용이 달라졌다. 제작비를 지원해 줄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주제가 바뀌진 않았다. 그 중 한 기획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동네는 마치 낡은 포구의 선술집 같다. 허망한 바다를 돌고 돌아, 부서질 듯한 쪽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연민의 술 단지를 찬양하는’ 영등포가 예전에 포구였고 나이든 분들은 안동네를 안창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연민’의 정은 대학시절부터 나를 붙잡고 있던 화두였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우린 서로 조금씩 못난 사람들이니까.

상현이는 택배회사 사장이 돈 떼먹고 오히려 큰 소리 칠 때, 의자로 찍어서 빵에 갔다 오고, 정선이는 중학교 때 룸살롱 기도 보다가 아가씨 괴롭히는 진상손님 재떨이로 후려쳤는데 알고 보니 ‘형사님’이라 서울로 도망가서 더 큰 조직에 들어가고, 나는 ’KBS 촬영’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면 불법유턴하고 과속해도 딱지를 안 끊어서 PD일에 재미를 붙였는데 세월이 가다보니 빼도 박도 못하고 미래 없는 이 직업을 계속하고 있다.

내 동생은 출신 성분(지방대 출신 경찰)이 안 좋아서 승진을 못하는가 하고 선배의 권유로 양주병에 수표를 넣어 상사에게 보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정의로운 경찰을 꿈꿨던 동생이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얼마나 쑥스러워 하던지- 금액이 적었는지 기별이 없었단다. 동생은 급기야 휴직 후 (아버지 노후자금을 빌려서) 런던 유학까지 갔다 왔고, 이후 G20 기획단 등에 발탁되어 열심히 일하다 과로로 세상 떴다. 그리고 결국 인사고과가 아닌 자동승진으로 경사를 달았다.

대박난 놈, 출세한 놈, 거머쥔 놈들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더러운 꼴, 야비한 꼴, 치사한 꼴 견디고 살아야하는 서로의 지친 어깨를 두드리며 살아보자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다. 안동네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고 실패자고 범죄자고 길거리에서 밥이나 한 끼 먹여 보낼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 영등포 안동네

촬영을 시작한지 1년 만에 방송콘텐츠진흥재단에서 제작지원금 5000만 원을 받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대한민국 대표 다큐멘터리의 산실이자 대표 유모,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곳에서 제작지원한 작품들을 살펴보자. 아시아 최초로 칸영화제에 비견되는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이승준 피디의 <달팽이의 별>(세계영화제에서 받은 상패만 100개가 넘어 박스에 때려 넣었다는 소문이 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새로 쓴 진모영 피디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안재민 감독의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는 세계적인 배급사를 통해 해외 방송 전파를 타고 있고, 박혁지 PD의 <춘희막이>는 프랑스 ARTE와 독일 ZDF, 알자지라와 공동제작을 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위상을 높였다.

이곳은 지원금만 툭 던지고 6개월 만에 작품을 내 놓으라고 닥달하지도 않는다. 제작 진행상황을 꼼꼼히 관리해주면서 해외 다큐멘터리 유통망을 접하게 해주었고, 몇 번에 걸친 워크숍으로 글로벌 다큐멘터리 제작 시스템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 젖을 물고 작품에 몰빵했다. 내 뼈를 솥에 넣고 장작을 때는 심정으로, 수십 년 세파에 절여진 인간들의 가슴속 수백 미터를 자맥질하다 허파가 찢어질 듯한 고통에 눈물을 훔치기도 하며….

편집만 1년을 한 거 같다.(50분짜리 방송용 다큐는 보통 10일이면 끝낸다.) 이 영화에는 주요 등장인물이 세 명이다. 나는 이들에게 나의 모습을 투영했다. 특히 용가리 정선이는 마치 젊은 날의 순정을 보는 것 같은 아련함이 있다. 양파를 자를 때 훅하고 덮치는 싱싱함, 그 매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놀라운 원시적 생명력을 지닌. 그랬다, 정선이는 철없고 객기로 충만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고 왕초는 끝없이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지금의 나, 복수는 모든 욕망과 노력이 허망함을 깨닫고 만인만물과 화해할 수 있는 언젠가의 나.

대단원: 왕초의 친구, 용가리의 형

영화의 결말은 씁쓸하다. 왕초는 결국 누가 봐도 떳떳하지 못한 선택을 한다. 작년 DMZ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할 때 왕초를 불렀다. 긴장됐다. 이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화를 보고 왕초는 내 등을 두드리며 ‘영화 개봉도 하고 대박나라. 아무리 바빠도 밥 잘 챙겨먹고’-지 못난 모습을 세상에 까는데도. 얘는 내 친구다. 내가 돈이 없어 쌀 떨어질까 NGO에서 나눠준 쌀가마니를 차에 실어주기도 하고 겨울에 손 시리다고 지 장갑을 내 손에 껴주기도 하고.

개봉을 앞두고 고인이 된 용가리 정선의 어머니 집을 찾아갔다. 핸드폰 연락처를 한 번 날려먹어서 2년 전 기억을 더듬어 광주로 내려갔다. 촬영본을 캡처한 정선이 집 사진을 들고 배 한 상자를 어깨에 메고, 골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난 그 골목에서 배 상자를 땅에 내려놓고 말았다. 집모양이 다 똑같았다. 옆골목도 뒷골목도 다 똑같다. 그렇게 한 시간을 헤맸다. 비까지 오는 와중에 통장, 반장집을 두드리고 이전 통장까지 동원해서 결국 찾았다. 1년 전에 이사를 하셨단다.

“오매야…” 정선이 어머니는 나를 보시자마자 눈물을 글썽이셨다. 자고 가라는 걸 억지로 만류하고 집을 나서는데 차비라도 하라며 돈 10만 원을 다짜고짜 주머니에 넣으시는 거다. 찜질방 청소하시며 생활하시는 분이…. 그리고, 나를 안으셨다.

개봉하던 날, 한창 개봉파티를 하고 있는데 정선이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개봉일에 영화를 보셨단다. 늦은 밤, 몇 번이고 망설이다 전화하셨을 어머니. “고마워… 정말 고마워….” 개쓰레기 취급받던 당신 아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동생으로 담아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병신같이, 예쁘고 젊은 배급사 친구들 앞에서 낼 모레 쉰 살인 놈이(정확히 낼 모레는 아니다)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 상현과 복수

지난 10일 토요일 모 신문사 기자 등 대학 선·후배와 <왕초와 용가리>를 보고 낮술을 진하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사 기자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추석 전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후배는 말했다. “형, 명색이 철학과 나온 사람이 뭐 그런 부탁을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 영화를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유는 많다. 하지만 진정 최우선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 나는 정말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망가진 놈, 부러진 놈, 엎어진 놈' 취급받는 안동네 사람들을 평범한 이웃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복지 정책을 뿌리째 바꾸길 바란다. 이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면 그 이웃이 행복해지고 이 나라가 행복해질 것을 믿는다.

왕초의 친구, 용가리의 형, 이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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