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그 시대, 느와르로 그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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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감기] 신지혜 CBS 아나운서·시네마토커

사진 속의 그들은 멋있었다. 몸에 잘 맞는 수트를 갖춰 입고 그럴 듯한 포즈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은 글자 그대로 멋있었다.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대, 나라를 되찾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목숨을 내놓은 그들의 모습이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그 감정과 그 생각은 그러나, 이질감이나 위화감을 주지 않았다. 왜일까.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당장 내일 어찌될지 모르는 삶을 살았던 그들.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내놓은 그들. 그래서 그들은 낭만과 멋을 향유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잠깐의 여유로운 순간에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랄까. 그 마음이 사진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이다.

김우진.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양복을 갖춰 입고 한량 행세를 하고 있지만 중국과 서울을 오가며 은밀하고 치밀하게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채산.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얼굴을 신분을 절대 노출할 수 없었던 그는 비밀스럽게 대범하게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을 당기고 있었다.

▲ 영화 ‘밀정’

정채산과 김우진이 누군가를 만난다. 아직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때 미명의 시간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폐된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이정출이라는 이름의 남자. 그는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이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일본의 경부가 되어있다.

이정출은 이 자리가 얼떨떨하기만 하다. 물론 상부의 명령으로 김우진에게 접근한 건 맞지만 김우진은 덥석 그의 말을 물었고 어느새 친근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무도 정체를 제대로 본 적 없는 정채산, 이정출의 목표인 정채산과 떡 하니 마주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 사람들 순진한 건지 고수인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이정출은 의열단과 이상한 관계를 맺게 되고 이정출의 마음과 행동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

김지운 감독은 스타일리스트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스크린에 잘 풀어내는 진중한 감독이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을 떠올려보면 그 얼마나 신선하고 오싹하며 재미있고 매력적이었는지!) 이후 그는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그것이 세간의 어떤 평을 들었던 큰 상관이 있을까. 그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갈수록 그 자신의 색감과 질감이 구축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그 고단한 시대를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그린 영화는 꽤 있다. 하지만 <밀정>이 그 가운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느와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반부가 지나고 중반쯤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우리는 이런 기분을 더 진하게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진하게 프렌치 느와르의 분위기를 더 진하게 우려냈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재미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의열단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느와르의 분위기를 주면서 이정출의 말처럼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시대’를 보여주며 선과 악의 스테레오 타입을 무너뜨리며 혼돈의 시대, 혼란의 시대, 한 줄기 빛을 움켜쥐고 모든 걸 걸어야 했던 사람들이 숨을 쉬던 그 시대를 적당한 무게감을 조율해 내고 있다.

<밀정>은 암울한 시대를 고스란히 그려낸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누군가들의 의협심을 그려낸 영웅담도 아니다. 억지로 짜맞춘 드라마도 아니고 스타일로 눈속임을 하는 현란한 영화도 아니다. 그래서 <밀정>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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