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은 우리의 힘: 포스트잇-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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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은 우리의 힘: 포스트잇-액션
[김민정 PD의 들여다보기] 김민정 KBS PD
  • 김민정 KBS PD
  • 승인 2016.09.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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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나무 조각, 뚜껑과 컵이 딱 안 맞물려 조금씩 질질 새는 테이크아웃 커피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살짝살짝 벌리는 110도 정도의 쩍벌…. 성가시다면 성가신 것들,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들, 하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상쾌한 기분을 망치기엔 충분한 그런 짜증의 실마리들. 일상에서 우리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들은 저런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다.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큰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돌부리인 것처럼 말이다.

나쁜 놈들도 누가 봐도 나쁜 놈인 것들보다 은밀하고 사소하게, 신발 속 나무 조각처럼 디테일하게 나쁜 놈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 신(GOD)만 디테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마도 디테일에 있는 법. 사소하게 나쁜 것들 투성이인 거리에 아주 사소하게 맞선 이들이 있다. 여성민우회의 ‘포스트잇 액션’ 프로젝트. ‘신봉선을 아이유로 만들어주는 통기타 레슨’이란 전단지엔 <안 웃겨요~> 포스트잇을, ‘맞벌이 하는 엄마가 집에 오지 않는 탓에 쌓여 있는 빨래의 소회를 담은’ 시 구절엔 <지금이 고조선이야 뭐야~> 포스트잇이 붙는다.

이번 ‘포스트잇-액션’은 사소하다는 이유로, 혹은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클리셰처럼 널리 쓰인다는 이유로 우리가 모른 척 하거나 참아온 나쁨들에 ‘사소한’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한다. 문제제기에도 연습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여성민우회의 이번 판단과 실천에, 난 <포스트잇 협찬>을 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많은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사소함. 사소하게 시작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고 그 속에 재미와 유머가 깃들 공간이 생길 수 있으니까.

▲ 한국여성민우회 액션 포스트잇 ⓒ한국여성민우회

그런데 사실 사소함은 생각만큼 사소하지가 않다. 사소한 부분들은 언제나 정체성과 본질을 드러낸다. 강남역에 나붙은 노골적인 성형독려 광고들은 이제 우리 사회가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서라도 표준화된 미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드러낸다. 천박한 문구들이 오히려 자신감으로 승화되는 독특한 강남역의 정체성은 <얼굴은 A급, 가슴은 D컵>과 같은

사소한 메시지들에서 베어 나온다.

사람의 인격도 마찬가지다. ‘딸처럼 생각해서’ 캐디의 엉덩이나 인턴의 허리를 움켜쥐는 디테일, ‘첫사랑이랑 닮아서’ 제자에게 노출사진을 요구하는 디테일. ‘아이를 가졌으니’ 이젠 사무실에서 책상을 좀 빼야하는 것 아니냐는 깨알 같은 오지랖. 모두 디테일하게 섬세한 악행들인 동시에 우리 공직사회와 학계가 얼마나 이상한 인간들로 가득한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의 몸에 대한 권리와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그 핵심을 보여주는 ‘사소함’이다.

포스트잇은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우리 사회의 좋고 나쁜 디테일들에 지지를 보내거나 혹은 딴지를 거는 매개체로 급부상중이다. 아마 이 물건, 올해의 10대 키워드에 꼭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여성혐오 이슈가 불타올랐을 때도, 구의역의 안타까운 사고로 한 청년이 목숨을 잃어 안전의 외주화 이슈가 불타올랐을 때도 그 불꽃을 더 활활 타오르게 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붙인 <포스트잇>이었다. 소위 전문가들은 그것이 SNS세대인 요즘 젊은이들의 소통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평가들을 내 놓았다. 익명성이 보장되고,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고 등….(믿거나 말거나)

▲ 지난 5월 22일 오후 서울 강남역에 여성 혐오 살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들을 담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뉴스1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잇의 미덕은 신속하게 붙일 수 있고 의외로 잘 안 떨어지며, 무언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어떤 사안들에 대해 기억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 미덕이 내가 포스트잇 덕후인 이유이기도 하고. 강남역과 구의역 그리고 이번 여성민우회의 프로젝트까지, 포스트잇은 사회적 무기 혹은 도구로 급부상하며 <쉬운 연결과 상기>의 가능성을 증명해보였다. 쉽다는 건,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들었던 어떤 미안함과 두려움을 표현할 수 있게끔 만들었고, 상기의 가능성은, 그 마저도 관심 없는 이들을 아직 잊어서는 안 되는 거야... 라며 계속 불편하게 흔들었다. 사소한 참여 그리고 사소한 불편함. 모든 것은 그렇게 사소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누구라도 가방 안에 포스트잇과 볼펜을 챙기자. 디테일에 숨은 악마들의 이마에 <꺼져>라는 포스트잇을 붙이자. 바야흐로 대자보의 자리를 포스트잇이 넘겨받은 지금 앞으론 사소하게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을 더 이상 봐주지 말자. 사소한 목소리들이 조금씩 모여 통곡의 벽을 이루는 장관을 보여주자. <웃자고 하는 소리에 그렇게 죽자고 덤벼>라고 누군가 조언한다면 <너나 웃기지>라고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 그대 부디 목소리와 분노와 양심을 숨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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