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PD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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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PD의 그러거나 말거나]

‘도대체 저 아저씨들은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까?’ 신입사원 시절 PD 선배들을 보면 이런 의문이 들곤 했다. 추레한 옷차림에 피곤에 찌든 얼굴, 그리고 왠지 모르게 구부정한 자세까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시절 PD 선배들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로 궁상맞은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선배들은 조용한 듯 하지만 역동적이었고, 어두운 듯 하지만 빛났다. 무엇보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었다. 나는 그 근거 없는(?) ‘자뻑’의 정체가 늘 궁금했다.

이제와 돌이켜 보건대 그건 PD라는 자부심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PD였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듬성듬성 백발의 노선배도 PD였고, 하는 일이라곤 테이프 들고 뛰는 게 다였던 나 같은 초짜 신입사원도 PD였다. 나보다 20년 일찍 입사한 CP 선배도 PD였고, 3대가 덕을 쌓아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국장 선배도 PD였다. 심지어 KBS PD 조직 전체를 책임지던 본부장도 자신의 정체성을 PD로 여겼다.

선배들은 ‘야 내가 언제부터 간부였다고, 나도 너랑 똑같은 PD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직위보다는 자신이 PD라는 사실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PD였다. 나는 그런 선배들의 모습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 KBS PD사회에는 PD가 없다. PD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도대체 그 많던 PD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KBS 드라마 <프로듀사> ⓒKBS

확실한 것은 PD 대신 관료가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한 편집에 선배가 손대는 것을 용납 못했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후배의 편집은 자기 맘대로 바꿔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데스크,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방송을 못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팀장, 민감한 시사 아이템은 어떻게든 무산시키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부장, 불편한 출연자를 낙마시키고 나에게 그럴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본부장까지… 이 조직엔 자신의 권한 행사에 충실한 관료만 남았다.

상하 관계가 분명한 회사에서 상급자가 결정권을 주장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경하고 불편한 풍경이다. 내가 알던 PD 선배들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후배를 옆에 앉혀놓고 ‘PD는 말이야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라고 가오(?) 잡던 사람들인데 말이다.

우리가 PD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느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동료나 후배 PD를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방송을 만드는 PD라면 그의 경력이나 실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선배고 간부라고 해도 방송을 만드는 제작 PD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 역시 방송 제작이라는 신성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나도 PD고 너도 PD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네가 하는 일도 중요하다. 견해, 취향, 스타일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PD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아서 지키려했던 우리 동네의 룰이었다. 지금 관료들은 그 룰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 2011년 6월 3일 한국PD연합회 주최로 열린 ‘나는 PD다’ 행사에서 최승호 당시 MBC PD(현 <뉴스타파> PD, MBC 해직 PD)가 발언하고 있다. ⓒPD저널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부심도 자라지 않는 법이다. 지금 KBS PD 사회에서 후배들이 느끼는 감정이 딱 그렇다. 발제한 아이템은 킬 당하고 밤새 만들어놓은 편집본은 시사 과정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프로그램도 못하는 놈’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무슨 자부심이 생기겠는가! PD가 되면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일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꿈에 부풀어 입사한 후배들에게 지금의 조직 문화는 절망적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PD가 아니라 말 잘 듣는 회사원이 되길 강요하는 PD사회. 이런 판국에 창의성이나 혁신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가!

우리 모두가 PD였던 시절이 있다. 비록 몰골은 궁상맞아도 방송 만드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넘쳤던 자신만만 PD였다. 동료와 후배를 존중할 줄 아는 PD였다. 무수한 실패 속에서도 ‘자부심’과 ‘존중’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PD였다. 이게 무슨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랬다.

아무리 나라가 거꾸로 가고 회사가 퇴행해도 우리는 PD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못난 선배 한 둘이 먼저 관료가 됐고, 그 보다 조금 덜 못난 선배 한 둘이 그 길을 따라가더라도 우리 PD 사회가 관료제에 투항해서는 안 된다. 그건 우리의 미래를 죽이는 일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스스로에게 질문에 보시라. 나는 PD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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