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는 선배들의 책상을 훔쳐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웠다. 그들의 책상 위엔 언제나 책이 가득했다. 어떤 선배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큰 이불이 들어가고도 남을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와선 책으로 그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조연출이던 나는 새벽이 되면 몰래 편집실을 빠져 나와 높게 쌓인 책을 죽 훑어보았다. 내가 보았던 책들이 높게 쌓인 책의 행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면, 나는 나지막이 환호했다. 당신들이 먹고 자란 책을 나도 언젠가 한 입 베어 물어 본 적이 있었다는 기쁨, 그리고 어쩌면 나도 시간이 지나면 당신들처럼 좋은 PD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를 감쌌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한글날 특집 방송에 자막을 얹어놓고 집으로 가던 새벽, 문득 오래 전 환호하던 옛 새벽을 떠올렸다. 매일을 내일의 기대로 마감하던 밤들로부터, 조연출의 꼬리표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연출이란 이름표를 달게 된 지금의 나는, 얼마나 멀리 왔나. 그들이 먹고 자란 마음의 음식이 궁금했던 만큼, 이제는 내가 그 동안 먹고 마셨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술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되짚어 보고 싶어졌다. 아마도 지금 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들은 나를 키워낸 8할이 무엇인지 말해줄 것이다.
요즘 내가 책상에 올려둔 것은 바로 우치누마 신타로의 책 <책의 역습>이다. 얼마 전 “TV를 안 본지 1년이 넘었어요”라는 말을 술자리에서 들었을 때, 나는 아찔했다. 그 옆에 앉은 친구가 “난 벌써 7년째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술자리에서 우리는 가장 오래된 매체인 책을 파는, 책방의 미래를 논의하던 중이었다. “더 이상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시대에 책방을 운영하는 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와 같은, 아픈 말들이 오가던 공간에서 나 역시 책의 미래를 두고 한 두 마디 말을 보태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책의 미래만큼이나 TV의 미래에 대해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당연히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TV가 책보다 먼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친구들이 자기가 방송을 접하는 방식들을 들었을 때 의문은 더욱 커졌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닐 테지만 ‘요즘 젊은 것들’에겐 방이 없고, 가족이 없으며, 시간이 없다. 방이 없으니 큰 TV가 없고, 가족이 없으니 <가족오락관> 같은 것보단 <나 혼자 산다>가 더 재미있으며, 시간이 없으니 ‘본방사수’보단 ‘정주행’이 더 익숙하다. 놓친 프로그램은 다운 받아 보거나, 다음날 올라오는 ‘짤방’과 ‘캡처’로 내용을 파악하면 된다. 이들이 경험하는 프로그램은 TV라는 물리적 매체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사의 입장을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하고, 또 가장 쉬운 경로가 바로 TV였다.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방송이 공공재라는 사실이 변함 없다면, 방송으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을 만들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방송사의 사업을 쉽게 전환할 수는 없다. 더욱이 방송사도 덩치가 작은 회사가 아니니,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모든 제작, 유통 방식을 즉각적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우치누마 신타로의 <책의 역습>을 읽었던 건 그때부터였다. 자기 자신을 ‘북 코디네이터’라고 소개한 그는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책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서점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어떻게 하면 책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책의 역습>은 우치누마 신타로가 고민하고 실행했던 다양한 기획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러니 비슷한 운명에 처한 지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점을 오랜 시간 운영하며 우치누마 신타로가 느낀 건, 책은 사람들의 대화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사람들은 친구나 지인의 SNS에 올라온 이야기들, 게시판에 올라온 소설 같은 일들을 두고 이야기했다. “어제 그 글 봤어?”라거나 “어제 올라온 영상 조회수 대단하던데?”와 같은 말을 할지언정, “어제 그 책 봤어?”라고 말하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책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건 꽤나 곤란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책을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만들어야 했다.
우치누마 신타로가 선택한 방법은 책을 사고, 책을 읽는 행위를 ‘특별한 경험’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맥주와 함께 책을 팔며 ‘혼술’에 익숙한 젊은이들에게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거나, 정갈한 필기가 남아 있는 책을 엄선해 팔아 독서의 경험을 이어가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쉽게 검색할 수 있게 데이터를 전자화해서 어디서든 참조할 수 있게 만든다거나, 내가 친 밑줄과 상대방이 친 밑줄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모든 생각의 끝에는 책이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맞닿아 있었다.
나의 소망도 비슷한 것이었다.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렇다면 고민도 비슷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시청 습관이 달라진 사람들에게 내 프로그램이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TV를 통해 방송을 보진 않지만, SNS와 인터넷을 통해 방송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쯤, 저자는 책 후반부에 이렇게 썼다. 자신의 기획은 언제나 “책의 무엇을 지키고 싶은 것인지, 어디가 없어지면 안 되는지”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말이다. 다시 한 번 아찔해졌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MCN, 팟캐스트, 카드뉴스 등 최근에 등장하는 다양한 채널들에 눈을 돌리다 보면, 어째서 사람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라도 프로그램을 접하려고 하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 시청자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어가면서도 보고 싶은 게 있고, 내일 이야기할 거리를 찾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을 그들이 보고 싶게 하려면, 그리고 그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려면, 그래서 “어제 그 방송 봤어?”라는 말을 들으려면 어떤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가공해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만한 소스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소스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포기하면 안 되는, 가장 지켜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럼 좋은 소스란? 질문은 그치지 않는다.
질문을 채 마치지 못한 채 나는 책을 덮었다. 이 책의 옮긴이는 책의 맨 뒤를 차지하는 자리에 자신을 “책이 안 팔린다고 투정하던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책의 역습>만큼이나 TV의 역습이 필요할 때, 아직 ‘젊은’ 나는 관성에 몸을 맡긴 채 굴러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동안 너무나 피곤했던 것일까. 어떤 것이든 질문이 부족했던 시간이었던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새로 질문을 시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 책을 책상 위에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