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검열해야 할 문화예술인 9437명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문화예술인들이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행동위원회 소속 예술가 100여 명은 1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리스트 논란은 국가기관의 통제·관리 속에서 문화예술계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훼손·왜곡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며 국회 청문회를 통한 진상 규명과 책임 처벌을 주장했다.
“예술 검열, 히틀러·박정희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
이날 기자회견에 앞서 예술가들은 블랙리스트 의혹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1시간 30분 동안 진행했다. 화가 임옥상 씨는 ‘블랙리스트’라고 적힌 검은 망토에 자신의 신분증을 붙이고 퍼포먼스를 진행했으며, 넋전 춤 무용가인 양혜경 씨는 깃발 넋전춤으로 예술의 자유를 박탈당한 한을 표현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문화 예술계 원로이자 통일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이런 일은 20세기 초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이나 일본의 제국주의, 또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 때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규탄했다.
정부에선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알려지고 언론을 통해 공개된 블랙리스트 추정 명단 9437명은 크게 네 부류로 구성돼 있다. 지난 2014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명,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6517명, 2014년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그리고 지난 2015년 5월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문화인 594명 등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선 세월호 시국선언 등으로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금이 끊기거나 작품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는 문화예술인들의 증언과 함께 정부의 ‘검열’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연극배우 김지영 씨는 “연극인들은 세월호 정부 시행령을 폐기시키기 위해 2년 넘게 마로니에 공원에서 매주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데 이때 우리 극단 사람들 모두가 명단을 만들어 제출했었다”며 “이 명단이 그대로 블랙리스트에 올라갔고, 극단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정부는 연극배우들이 교복을 입고 나와 그걸 보면 ‘세월호가 연상된다’고 문제삼기도 했다”며 “예술인들이 총칼을 들고 청와대에 침입하려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검열을 하고 불이익을 주는 건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 3관왕’인 가수 손병휘 씨는 “과거 보도연맹이라는 게 있었는데 (정부 요구로) 동네에서 할당량을 채우려 아무렇게나 적어 낸 명단이었지만, (시절이 바뀌고) 그걸(명단을) 쥔 사람들의 생각은 엄청났던 것”이라고 지적하며 “지금 우린 웃고 있지만 이 허술한 명단이 앞으로 엄청난 비극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가 본질적으로 보도연맹 사건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다.
소설가 이시백 씨는 “예술이란 게 돈은 별로 안 되지만, 예술가들은 다가올 국가의 위기에 대해 경고하고 올바른 문화를 창달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예술을 하고 있다”며 “그런데 입맛에 안 맞는다고 예술가들을 탄압하는 것은 국민의 정당한 문화 향유권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문화에 대한 모독 행위”라고 비판했다.
화가 임옥상 씨는 “예술가를 탄압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라며 “예술가로서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 사태를 규탄하는 언론 기고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오는 11일 예술검열반대 2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포럼 개최와 박근혜 정부의 예술검열과 문화행정 파행 아카이브 전시 등을 위한 논의도 진행할 계획이다.
한편 이날 문화예술인들의 퍼포먼스와 기자회견은 서울 광화문광장뿐 아니라 세종시 문화체육관광부, 전남 나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앞에서도 함께 열렸다.